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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선생’ ‘율곡선생’이란 명칭에서 보듯이 ‘선생’은 구한말까지도 학문이 깊은 이에게 붙는 최고 경칭이었다. 그러나 서양 학위제도가 도입되면서 학사-석사-박사라는 일종의 계급이 생겼다. 우리만큼 ‘표절 학위’가 많은 나라도 없을 텐데, 위험 부담을 안고도 박사 학위를 따 두면 그 이상 보상이 따르기 때문이다.

런던대 골드스미스 칼리지 제임스 커런 교수는 세계적 석학이고 박사 제자가 전 세계에서 활약하고 있지만 막상 그는 케임브리지대 학사 학위밖에 없다. ‘박사’ 같은 ‘증’보다 실력이 있으면 통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지도교수 입학 면접 때 “나이도 많은데 왜 학위를 따려고 하느냐”는 질문에 “한국에서는 학위가 없으면 발언권이 적다”고 실토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부끄럽다.

국민의힘이 청년 대표라며 공동선대위원장으로 영입했다가 내친 노재승씨는 검정고시 출신 대통령 후보를 비정상인처럼 매도했다. 전여옥 한나라당 대변인은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을 겨냥해 “다음 대통령은 학력 콤플렉스가 없는, 대학 나온 사람이 적절하다”고 말했는데, 이 발언 이래 학벌주의를 부추기는 최악의 발언이다.

노씨는 또 이승만 전 대통령을 ‘대한민국 1호 박사’라고 부추기며 ‘김구는 국밥 좀 늦게 나왔다고 사람 죽인 인간’이라고 비하했다. 그의 발언이 극단적이긴 하지만, 독립운동에 훨씬 공이 큰 김구보다 이승만을 추앙하는 수구세력이 두꺼운 데는 학벌주의도 크게 작용했다고 본다. 김구는 서당 출신이지만 이승만은 프린스턴대 출신이다. 이승만 자신도 국민이 ‘이 박사’로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서울대 법대 출신 윤석열 후보의 선대위원장으로는 ‘김종인 박사’와 하버드 출신 이준석이 임명됐는데, 이들도 학벌에 의해 능력이 부풀려졌다고 생각한다. 김종인 위원장은 독일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땄지만 독일의 경제정책과는 거리가 먼 정책을 추구해왔다. 독일 기업들은 노동조합을 경영 동반자로 삼아 회계 투명성을 높이고 노조도 기업이 어려울 때는 고통을 분담하지만, 김종인은 노조의 경영 참여에 반대했다. 언론은 ‘경제민주화론자’라고 보도하는데, 그는 독재정권과 재벌경제체제 유지에 기여한 바 크다. 금융실명제와 부동산 중과세에도 반대했다.

이준석 위원장은 어떤가? 그는 미국이 정글의 법칙, 약육강식의 원리를 자연의 섭리로 본다며 미국식 자유의 가치를 사회 전반에 받아들이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과 더불어 세계에서 신자유주의를 가장 과도하게 받아들여 양극화가 극심해진 나라에서 그런 인식을 하고 있다. ‘억강부약’은커녕 재벌과 기득권층에 유리한 정책을 펴겠다는 사람이 따릉이와 킥보드 타면서 청년 대표 이미지를 심는다. 보수를 자처하는 정당의 대표 자리를 30대에 꿰찬 그는 ‘능력주의 화신’이다.

이번 대선이 능력주의자가 총출동하는 선거판이 된 것은 한국 정치에 심각한 퇴행을 가져올 공산이 크다. 유력 대선 후보들이 사시 출신이고 특히 윤석열 선대위에는 검사 출신만도 15명이 포진했다. 과거 군사정권이 검찰을 이용했다면 이젠 검찰 스스로 검찰공화국을 만들려 한다. 검찰은 체제 수호의 수단이지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조직이다.

오랜 진통 끝에 조금씩 정착돼 가던 주 52시간 노동제, 최저임금 인상, 중대재해처벌법, 종부세, 남북군사합의 등도 중단되거나 완화될 가능성이 커졌다. 이재명 후보도 정도는 심하지 않지만 양도소득세와 공시지가제 등을 완화하겠다는 발언을 하고 있다. 전 정부가 한 일을 되돌리려고만 한다면 우리 사회는 제자리걸음만 무한반복할 뿐 더 나은 세상은 신기루가 되고 만다.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시대정신 대신 시대착오가 횡행한다. <오징어 게임>이 한국에서 생겨난 것은 무한경쟁과 승자독식 논리에 거부감이 크지 않기 때문이다.

집권하면 영입인사의 지식과 비전을 활용해야 하는데 측근들 말고는 대개 토사구팽되는 게 한국 정치사이다. 유럽에서는 중·고등학생 때부터 정치교육을 받아 10대 중반에 정당에 가입하고 풀뿌리 자치단체를 거쳐 정치인으로 성장해 간다. 우리나라는 정치인 양성 시스템이 거의 작동하지 않는다. 각 분야에서 스스로 커온 전문가를 영입한 뒤 선거 후 차버리는 행태가 반복된다면 그 자체로 엄청난 사회적 낭비다. 대선용 위장 영입쇼에 유권자가 현혹돼서는 안 된다.

이봉수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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