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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드라마가 전 세계 넷플릭스 1위 자리를 차지했다는 소식은 이제 놀랄 일도 아니다. 좀비 바이러스가 퍼진 고등학교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주 서사인 <지금 우리 학교는>이 또 1위에 올랐다고 한다. 지난해에는 <오징어 게임>과 <지옥>이 그 자리에 있었다.

이 세 드라마에는 갑자기 생존을 위협받는 상황에 처하자 철저하게 이기적인 태도로 각자도생을 꾀하는 ‘인간의 잔악한 본성’이 그려진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다. 세 드라마에는 또한 재난에 맞서는 ‘인간의 따뜻한 본성’도 함께 그려진다. 다시 말해 이 작품들은 인간을 시험대에 올려놓고 극한 상황에서 두 가지 본성 중에 무엇을 택할 것인지 질문하는 이야기들이다.

그런데 시험대에 오른 건 드라마 속 주인공들만이 아니다. 시청자들도 시험대에 올려진다. 세 드라마는 어떻게 흥행에 성공했던가. 잔악한 본성의 묘사가 현실적이며 작품에 깊이를 더했다는 것이다. 반면 따뜻한 본성을 묘사하는 장면들은 시청자들에게 비현실적이며 신파적이라고 지적받았다. 작품들은 따뜻함이 잔악함을 이기는 이야기를 결말로 제시하지만, 시청자들은 잔악함이 따뜻함을 이기는 전개에 열광한다. 드라마에 대한 반응만으로 단정 지을 수는 없겠으나, 인간은 천성적으로 악하므로 연대할 수 없고 따라서 각자도생을 꾀하는 게 합리적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이라는 건 그리 새로운 얘기도 아니다.

지난 5년을 결산하면서 앞으로의 5년을 전망하는 시기에 ‘나’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겠다는 구호만 들려오는 것은 그래서일까. 이재명 후보의 ‘나를 위해’, 윤석열 후보의 ‘내가 행복해지는 내일’ 같은 슬로건들은 오늘날 정치의 상한선을 보여주는 구호들이다. 심상정 후보만이 ‘지워진 사람들’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적 약자들을 찾아다니고 있지만, 지지율은 오르지 않는다. 불과 10년 전 대선에서 ‘사람이 먼저다’(문재인)와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박근혜)의 대결이 후자의 승리로 끝난 이래 우리의 정치는 여기까지 쪼그라들었다. 연대의 믿음이 무너지고 각자도생만이 지지받는 사회에서 정치가 개개인을 잘게 쪼개 호명하는 것은 당연한 결론일 것이다.

결국 인간의 가능성을 믿는가의 문제다.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지는 과학자나 철학자가 다룰 영역이다. 다만 인간의 본성이 잔악한 것이라고 해도, 그 반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 또한 인간 안에 자리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적극적으로 택할 수 있고 또 택해야 하지 않을까. 극소수만이 살아남고 대다수가 생존을 위협받는 각자도생의 사회는 정치의 목표가 될 수 없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리베카 솔닛은 <이 폐허를 응시하라>라는 책에서 그 ‘가능성’을 증명하는 데 집착적으로 매달린다. 지난 100여 년간 대재난이 일어난 현장들에서 각자도생이 아니라 상호돌봄과 연대의식이 피어난 사례가 이 책에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 현장들 가운데 일부는 재난 이전에는 각자도생이 지배하던 곳이었지만 오히려 재난을 만난 직후 연대가 꽃폈다. 솔닛에게 당시의 기억을 증언하던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재난에 관한 기억임에도 ‘기쁜 표정’을 짓고 있었단다. 재난 이전의 사회, 다시 일상을 회복한 뒤의 사회에서는 갖기 어려웠던 따뜻한 환대의 경험이 그때의 기억에 자리하고 있어서다.

책의 서문에서 솔닛은 이렇게 썼다. “대재난을 당했을 때 주로 최악의 행동을 보이는 사람들은, 남들이 분명 야만적으로 행동할 것이므로 자신들은 야만적 행위를 막으려는 방어적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믿는 이들이다.” 재난 이후의 파국은 신뢰가 무너지고 공동체가 붕괴된 틈에서 벌어진다는 얘기다. 그 신뢰를 회복해 사회를 복원하겠다는 정치를 말하는 후보가 있다면, 적어도 이번 대선에서 내 한 표는 그의 몫이다.

강남규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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