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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3년여 매주 월요일 밤 공동체에서는 ‘현대와 사상’ 세미나가 열립니다. 일본의 인문학 잡지 ‘현대사상(現代思想)’을 참고하며 오늘날 사상의 행방을 추적하고 토론하는 세미나입니다. 대학 교수를 포함한 몇 분의 학자와 작가, 예술가, 대학원생 등이 두루 참여하는 이 세미나는 휴가철은 물론 웬만한 연휴에도 쉬지 않습니다. 세미나를 이끌어온 학자에게 청했습니다.

“그렇게 당신들끼리만 공부하지 말고 그동안 공부해 온 것들을 나누기도 하시라.”

여기에 답해 그가 내놓은 건 뜻밖에도 인류학 강좌였습니다. 최근 인류학에서 일어나고 있는 ‘고요한 혁명’ 혹은 ‘존재론적 전회’가 21세기 사상의 지형을 바꾸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보낸 강의 계획서를 보고 세미나 발제문을 비롯한 몇 편의 글을 찾아 읽었습니다. 그리고 놀랐습니다. ‘아, 아직도 학문이 이런 것을 할 수 있구나’라며 감탄했다던 강의 계획서의 첫 문장은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오래전 레비 스트로스의 인류학이 그 뒤 학문 전반에 충격을 주었듯이 새로운 인류학은 인문학과 사회과학, 비판이론, 예술 등에서 새로운 트렌드가 되고 있었습니다.

이 세미나를 이끄는 학자는 특정 분야를 전공한 연구자가 아닙니다. 종교학과 출신으로, 박사도 석사도 아닌 자유 연구자입니다. 지난 20여년, 그가 전공의 길을 가지 않고 자유 연구자로 살아온 것은 얽매이지 않고 공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을 놀라게 한 것, 매혹시킨 것은 무엇이건 공부했습니다.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말할 것도 없고 자연과학과 예술도 그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다 기쁨이 넘치면 책을 쓰거나 강의를 했다지요.

그가 여기서 처음 강의한 것도 ‘종의 기원’과 ‘상대성 이론’이었습니다. 종교학과 출신 연구자가 자연과학을 강의했으니 과학사의 뒷이야기 정도였을 거라고요? 아닙니다.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은 진화론이나 상대성 이론을 둘러싼 가십이 아닙니다. 과학사의 혁명적인 이론이나 공식이 수립된 과학적, 인문학적, 사회적 배경과 과정입니다.

이들 이론의 배경과 과정을 연구한 것도 기존의 과학을 격파한 과거의 유물로서가 아니었습니다. 지금, 여기 우리가 사는 21세기의 세계와 앎의 체계에 의문을 품으면서 150년 전 다윈, 100년 전 아인슈타인이 왜, 어떻게, 당대의 주류 학문을 비판하고 전복했는지가 관심사였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해당 과학 이론과 과학사뿐 아니라 인문학과 사회과학 등을 폭넓게 공부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쉬운 일일 수 없습니다. 한글과 영문 자료만으로 모자라 스스로 일본어와 프랑스어를 깨쳤습니다. 900쪽에 이르는 <종의 기원> 연구서를 비롯해 묵직한 책도 여러 권 쓰고 번역했지요. 그 덕분에 탄탄한 외국어 실력을 갖추게 된 그는 초속성 일본어 강좌를 열어 자신의 외국어 학습법을 전수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강의할 인류학의 고요한 혁명을 여기서 풀어놓을 여유도, 능력도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새로운 인류학이 서구 남성 중심의 전체론적, 이분법적 세계관을 뒤엎는다는 겁니다. 서구 이론으로 그들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존재 자체에 질문을 던지기, 우리 이론을 그들에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 우리 이론 만들어내기, 전능한 관찰자가 아니라 자신과 관찰 대상 사이의 변화를 중시하기. 이 혁명을 촉발한 메릴린 스트래선의 책 제목은 <부분적인 연결들>입니다. 그에 따르면 부분은 전체의 일부가 아닙니다. 중심이 사라진 파편화한 세계는 사람을 불안하게 하지만,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내며 창조의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존재는 의식을 규정합니다. 학위도, 전공도 없는 이 자유 연구자는 제도권 주류 학자들이 심드렁해하는 새로운 학문에 감전되듯 놀라 이를 파고들고 있습니다.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와 부분들의 초연결 시대에, 새롭고 혁명적인 학문도 중심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 연구자들에게서 가능한 것이 아닐까요?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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