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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초년병 시절부터 6㎝ 굽 구두는 나의 최애템이었다. 내게 운동화는 말 그대로 운동할 때만 신는 신발이었다. 발뒤꿈치가 까이고, 발바닥이 아파 절뚝거리는 한이 있더라도 6㎝ 굽은 포기가 안 됐다. 그랬던 내가 이제는 운동화만 신고 다닌다. 계절에 상관없이 거의 모든 일상이 운동화로 대체되었다. ‘다시 찾게 될 날이 올 거야.’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대로 쌓여 있는 구두들과, 새롭게 등장한 운동화, 단화들이 섞여서 신발장은 포화상태다. 결단을 내려야 할 때다. 지난주 나는 오랜 내 구두들과 작별을 했다.

“그래도 넌 오래 버틴 거야. 어디 신발뿐이니?” 말 나온 김에 친구들은 한마디씩 보탠다. ‘가방은 또 어떻고? 가죽 가방들이 즐비해도 무조건 에코백만 찾게 되더라’, ‘조금 큰 목걸이 하고 출근한 날이면 종일 목이 뻐근해’, ‘큰맘 먹고 장만한 구스다운도 옷장 속에 파묻힌 지 오래지’, ‘비싼 주물냄비는 쓸 엄두가 안 난다. 그거 설거지할 때 손목 떨어져 나간다고’, ‘그러고 보면 순서가 바뀐 거 같지 않니? 이것저것 안 따져도 되는 젊었을 때 오히려 좋은 것 실컷 하다가 나이 들면 자연스럽게 가볍고 단순한 걸로 돌아가는 게 순리인 것 같은데 말이야’. 한번 터진 얘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다가 ‘어휴~백세시대면 뭐 하니? 노화된 몸으로 오래 살아야 하는데’ 하는 탄식으로 마무리된다.

나에게 6㎝ 굽은 살면서 늘 아쉬웠던 내 키를 커버해 줄 수 있는 일종의 무기였던 것 같다. 이 무기를 장착하면 왠지 모르게 자세가 더 꼿꼿해지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소위 말하는 나만의 아우라가 더 돋보이는 것 같았다. 지금 그 무기를 버린 거다. 다시 곰곰이 반문해 보았다. 이 무기가 없어졌다고 변화된 게 있나? 특별히 더 난처하거나 속상했던 일이 있었나? 딱히 그런 것도 아니다. 운동화로 대체된 게 서글프기만 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운동화를 신게 되니 산책과 걷기가 부담 없어져서 그런지 더 편하고 자유로워진 느낌을 만끽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게 정말 나의 무기였을까?

나이 듦에 따른 신체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자는 뻔한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 그렇지만 나이 듦에 대해 부정적 인식이 강한 우리 사회에서 노화는 또 다른 ‘취약함’의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이에 김영옥 대표(옥희 살롱)는 취약함이 새로운 가능성이 되는 사유의 장(場)을 만들고, 늙음과 젊음의 경계를 질문으로 던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나이 듦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새로운 경험, 감각, 깨달음을 잘 인지하는 것뿐만 아니라, 늙어가는 게 꼭 낡고 서글픈 것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직접 보여줘야 하는 건 아닐까?

투박한 운동화, 중년화로도 어떻게 세련되게 멋을 낼 수 있는지, 말 안 듣는 몸 달래가며 어떻게 신체의 유연성과 강단을 유지할지, 흐릿해진 눈으로도 얼마든지 새로운 배움과 경험을 즐겁게 받아들이는지 말이다. 그리고 부족한 것들은 서로 돕고 채우는 노년의 찐한 우정의 힘도 보여주는 것이다. 한 가지 더! 나만의 심리적 무기를 더 이상 외모에서 찾으려는 발버둥은 금지다. 어차피 외모는 지속적인 무기가 될 수 없다.

자, 이제 당신은 무엇과 작별했습니까? 작별하시렵니까?

남경아 <50플러스세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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