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지식인은 ‘무엇이 진짜 앎인가?’ 하는 질문을 담고자 한 말이다. 우리의 앎은 삶을 구원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내 나름대로 응답하고자 한 말이다. 이 말을 구상한 것은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사물을 바라볼 때 ‘낮은 이론가’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한 말에서 착상을 얻었다. 시야 좁은 이른바 ‘전문가주의’가 아니라 대중어 구사 능력을 갖춘 지식인이 요청된다는 문제의식을 담고자 했다. 우리는 숫자로 표상되는 정형적 사고에 익숙해져 학력신수설 혹은 재산권신수설을 신봉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앎에서 삶으로’ 지식의 패러다임이 전환한 것을 이해하며 지식의 공공성을 생각해야 할 때다.
동네지식인의 삶을 산다는 것은 쉽지 않다. 나 역시 수년 동안 진행해온 동네 책읽기 모임이 중단된 후 동네에서 무엇인가 작은 실천을 한다는 것조차 엄두를 내지 못한다. 하지만 내가 사는 동네가 ‘삶터’이고, 재미있는 ‘놀터’가 될 수만 있다면 얼마나 매력적인가. 정부·지자체의 50+ 신중년 대상 정책사업이 지나치게 ‘사회공헌활동’ 일변도로 진행되는 점은 생각해보아야 한다. 누군가를 위한다는 발상 자체가 허위의식의 일종일 수 있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동네지식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나날의 삶과 노동에서 ‘할 줄 앎’을 배우고 ‘더불어 살 줄 앎’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으리라. 여기, 1961년생 시인 김해자의 모습에서 동네지식인의 탄생을 나는 강력히 예감한다. 산문집 <위대한 일들이 지나가고 있습니다>는 뇌수술 이후 천안 외곽 농촌에 귀촌해 15년째 초보 농사꾼으로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들이 따습다. ‘할 줄 앎’을 실천하는 시인의 ‘손’은 진짜 바쁘다. 시인이 ‘백 개의 손’을 의미하는 백수(百手) 농법을 주창하는 것이 이해가 된다. 무엇보다 양승분·맹구 언니·우정인 보살·임영자씨 등 70~80대 엄마 같은 언니들과 오손도손 함께 사는 재미를 누리는 모습을 보노라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 자기돌봄과 상호돌봄은 어떻게 가능한가를 생각하게 된다. 자본주의적 교환 대신 증여에 가까운 우정과 환대의 원리가 순환하는 삶을 살아가는 시인의 시와 삶에서 흙냄새 가득한 대지(大地)의 언어가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다시, 우리의 앎은 삶을 구원할 수 있는가. 시를 짓고, 농사를 짓고 사는 ‘동네지식인’ 김해자의 시와 삶에서 ‘생각하는 손’(리처드 세넷)의 진짜 힘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함께 살 줄 앎’이라는 앎이야말로 진짜 필요한 역량(capability)이고 지식의 공공성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나보다 약한 사람의 자리를 생각하며 ‘의자’를 놓고, 관계의 ‘평상’을 놓을 줄 아는 사람이 진짜 동네지식인일 것이다. 동네지식인의 시대가 오고 있다.
고영직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