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지옥이란 경이(驚異)를 잃어버린 우리에게 익숙한 모든 것. 경이로움이 내 안에서 죽었을 때, 권력(욕망)이 태어났다.” 아일랜드 시인 브렌던 케널리가 한 이 말을 요즘 자주 생각한다. 고물가, 고금리, 고환율 등 소위 3고(高) 시대를 맞아 도무지 재미있는 일이라곤 하나도 없는 세상에서 그래도 나날의 삶에서 ‘재미’를 추구하고 사는 게 나 같은 보통 시민들이 바라는 소박한 염원이기 때문이다. 

시민들이 바라는 ‘사는 재미’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소소하고 사소한 것들이다. 친구와 시시껄렁한 대화를 나누고, 연인과 아름다운 추억을 쌓아가고, 가까운 벗들과 ‘불금’이면 우정의 술잔을 나누는 것 같은 사소한 행위들이다. 얼마 전 내가 사는 동네에서 시인 박준과 가수 김필의 공연 <詩가 된 노래, 김필을 만나다>(양천문화회관)를 ‘직관’한 것은 소소한 행복이었다. 야구팬이라면 포스트시즌을 맞이한 야구 경기를 관람하는 재미 또한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사소한 일상은 나와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이라는 커뮤니티가 안전하고 안심할 수 있는 세상이라는 점을 우리가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을 때 배가된다. 내가 지금 누리는 이 작은 행복과 기쁨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는 일은 누구도 바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삶터와 대한민국이라는 커뮤니티가 재미있는 ‘문화사회’가 되어야 한다. 백범 김구 선생이 말한 ‘높은 문화의 힘’이란 결코 먼 이상이 아니다. 그러려면 지역 곳곳에서 크고 작은 축제들이 자주 열려야 한다. 축제는 나와 당신을 하나로 묶어주는 중요한 의례(ritual)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앙정부·지방정부 교체 이후 일부 축제들이 대폭 축소되는가 하면, 진행되는 축제마저 파행을 겪는 현상은 무엇을 말하는가. 3고 시대를 맞아 문화예산은 1순위로 삭감되었다. 하지만 이른바 K컬처는 하루아침에 나오지 않았다. 우리 삶에 ‘축적’된 문화의 힘에서 나왔다. 

일상에서 경이로움을 발견할 줄 아는 감각을 회복해야 한다. 그래야 인생을 사는 맛이 난다. 그러려면 어릴 때 잘 놀 줄 알아야 한다. 제대로 놀 줄 몰랐던 아이가 어른이 되어 재미없는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고실업 시대에 소리 없는 외로움이 갈수록 확산되고, 기후위기 시대에도 불구하고 ‘나 죽은 뒤에 홍수가 나든 말든’이라는 극단적인 이기심이 지배하는 사회는 진짜 ‘노답’이다. 인도 사상가 사티시 쿠마르의 말처럼 ‘그대가 있어 내가 있다’라는 감각을 회복해야 한다. 그런 힘은 문화와 예술에서 찾을 수 있다. 

최근 수원 시민 113명이 ‘시민-시인’이 되어 시집을 펴냈다. 수원문화도시센터가 10월 인문주간을 맞아 시민-시인들의 시집 <나풀거리는 찬란한 것들>을 출간한 것이다. 어느 중학생이 쓴 “내 주변엔 맛있는 팝콘 천진데// 그런데/ 왜 나는 항상 탄 옥수수일까”(‘사랑’)라고 쓴 연애시를 읽고 한참을 웃었다. 누군가를 웃게 하는 행위야말로 사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이 가을, 당신은 누군가를 웃음 짓게 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나풀거리는 일상에서 찬란한 것들을 발견할 줄 아는 경이로움의 감각을 우리 모두 회복하자. 우리는 모두 시인(예술가)으로 태어난다.

<고영직 문학평론가>

 

 

연재 | 인생+ - 경향신문

69건의 관련기사 연재기사 구독하기 도움말 연재기사를 구독하여 새로운 기사를 메일로 먼저 받아보세요.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검색 초기화

www.khan.co.kr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5/06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