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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귀에 대고 날마다 “지구는 실제로 평평해. 코로나19는 빌 게이츠가 백신 장사로 떼돈을 벌기 위해 만들어낸 거야”라고 속삭이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아마 처음에는 솔깃할지 모르지만, 곧 그를 멀리하게 될 것이다. 왠지 통제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만일 ‘그’가 사람이 아니고 프로그램이라면? 유튜브 사용자들은 ‘그’가 추천해주는 영상 콘텐츠를 무한정 시청할 수 있다. 정권 비판자는 ‘문재앙’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영상을, 지지자는 ‘문프’를 칭송하는 화면을 끊김 없이 접하게 될 것이다. ‘그’는 우리가 과거에 어떤 정보를 얼마나 오랫동안 시청했는지를 통해 우리의 관심사를 예측하여 선호될 만한 정보를 연속 재생한다.

문제는 매사에 극단적 언행을 일삼는 사람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거부감과 달리, 온라인상에서는 극단적 영상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훨씬 더 관대하다는 데 있다. 이것은 마치 온라인 슈팅 게임에서는 피가 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진짜 전쟁터의 공포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유사하다. 그래서 오히려 더 자극적인 게임에 열광한다.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사라지면 우리 속의 극단은 꿈틀거리고, 우리는 훨씬 더 극단적 부족주의자들로 돌변한다. 더 큰 자극은 (자기들끼리의) 더 진한 공감을 낳는다.

공유 플랫폼은 나의 클릭을 우리의 분열로 이끄는 기이한 마력을 갖고 있다. 네트워크 과학에 따르면 페북의 여기저기서 ‘좋아요’를 200번 정도 누르기만 했어도 ‘그’는 당신의 실제 절친이나 연인보다 더 정확히 당신에 대해 안다. 300번 이상 눌렀다면 당신 자신보다 당신을 더 잘 안다! 가령, 광고주가 요구한다면 ‘그’는 트럼프 지지자에게는 트럼프를 더 좋아하게 만들 수 있는 정보를, 트럼프 반대자에게는 트럼프를 싫어하지 않게 만들 수 있는 콘텐츠를 보낼 수 있다.

실제로 이런 일들이 터질 때마다 ‘그’의 설계자 저커버그는 “우리는 플랫폼이지 미디어 회사가 아니다. 제3자가 우리 플랫폼에서 무슨 일을 하든 우리는 책임이 없다”고 말해왔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페북이 단순 친목 플랫폼이 아니라는 사실쯤은 알고 있다. 페북만이 아니다. 사실상 모든 SNS가 사용자의 의사결정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미디어로 기능하고 있다.

그런데 이 미디어의 위력이 무섭다. 최근 넷플릭스의 개봉 화제작인 올롭스키 감독의 다큐멘터리 <소셜 딜레마>는 구글, 페북, 트위터 등의 과거 주역들이 등장해 데이터 브로커로 전락한 자신의 발명품들에 대해 경고한다. 페북의 ‘좋아요’ 버튼 개발자는 “우리가 ‘좋아요’ 버튼을 만들 땐 세상에 긍정과 사랑을 퍼뜨리는 것이 목표였다. 오늘날의 10대가 ‘좋아요’를 덜 받아서 우울해하거나 정치적 양극화를 걱정하는 것이 우리의 의도는 아니었다”고 털어놓고, 핀터레스트의 대표를 역임한 켄들은 SNS가 지금처럼 사용자의 마음을 계속 갈취한다면 가까운 미래에는 “내전이 일어날 것”이라며 두려워한다.

<소셜 딜레마>의 최고 메시지는 “상품의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면 바로 당신이 상품”이라는 명제다. 우리가 유튜브나 페북을 무료로 사용하는 게 아니고 그 회사들이 우리를 상품(데이터)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얘기다. 기업이 소비자의 관심을 얻기 위한 무한 경쟁에 돌입한 것은 오래지만, SNS가 소비자의 선호 예측 모형을 엄청난 수준으로 정교하게 다듬었다는 측면은 분명 새로운 변화라 할 수 있다.

문제의 핵심은 그 예측 모델이 과거의 언행에 기반해 있다는 점이다. 한 인간으로서 우리는 성장한다. 매일 어떤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는지에 따라 인생은 변하고 또 변한다. 우연은 삶의 필연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과거가 미래를 결정하는 식의 추천 알고리즘을 작동시킨다면, 우리의 테크놀로지는 한 개인의 성장과 변화를 가로막을 수 있다.

인류는 사회적 동물이다. 그렇기에 큰 공동체를 만들었고 문명을 건설했지만, 타인에게 영향받는 민감한 존재로 진화했다. 우리의 본능은 타인의 평판에 민감하고 집단의 대세를 따르고자 하며 집단의 일원으로 인정받길 갈망한다. 자신과 견해가 유사한 타인에게 훨씬 더 큰 호감을 느낀다. 작은 무리 생활을 했던 수렵채집기에는 이런 본능 자체가 이득이 되었겠지만, 지금처럼 다양한 문화와 가치를 품어야 하는 대규모 사회에서는 오작동을 일으킬 수 있다. SNS 기술이 위험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유튜브나 페북 없이 삶을 살 수 있을까? ‘디지털 아미시(Amish)’ 같은 길이 물론 있다. 하지만 쉽지도 않고, 지속하기도 힘들다. 두 번째 길은 ‘디지털 다이어트’를 시도하는 삶이다. 가령, 스마트폰은 끄고 잠자리에 들기, 간헐적 단식처럼 며칠 사용하지 않기 등의 방법도 효과가 있다. 유튜브나 페북에서 추천해주는 세상이 단지 하나의 세상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될 것이다. 어떤 세상이 더 크고 중요한지는 그가 그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과 애정을 쏟았는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세 번째 길은 알고리즘을 개선하는 방법이다. 현재의 알고리즘은 과거만을 기반으로 편견을 부추기는 폐쇄 방식이지만 새로운 선택을 하도록 적절한 기회를 주는 열린 알고리즘이 불가능하진 않다. 만일 인간의 성장에 대한 연구와 깊은 융합이 일어난다면 이 기술적 혁신의 길은 기업과 고객 모두 웃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 시대에 우리는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온라인 세계에서 쓰고 있다. 그만큼 중요해졌고, 그만큼 더 위험해졌다. 양극화의 위험은 더 커졌고 비판적 중도의 입지는 줄어들었다. 온라인은 이미 내전 중이다. 그러나 얼마나 다행인가! 좀 더 평온한 오프라인 세계가 있다는 사실이.

<장대익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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