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는 사이 정부에 의해 인구 재생산 도구로 취급받던 여성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우선 저출산이란 용어부터 잘못되었다고 비판했다. 여성만이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생물학적 사실을 강조해서 출산을 여성의 문제로 돌리기 때문이다. ‘저출산’ 대신 ‘저출생’이란 용어를 사용하자고 주장했다. 여성이 아이를 출산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아이가 덜 출생해서 문제다. 이 주장은 상당한 호소력을 발휘했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정책 홍보나 언론 보도에서 사용되는 용어는 대부분 저출생으로 바뀌었다. 지자체가 사용하는 공식 용어를 저출생으로 변경하기 위한 조례 개정도 이어졌다. 그럼 성차별적인 용어를 바꾸고, 여성들이 아이를 낳고 키울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확보하면 다시 아이들이 많이 태어날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출산에서 저출생으로 프레임을 바꾸어도, 성적 사랑을 국민을 재생산하기 위한 기능적인 필수행위로 보는 시각은 견고하다.
이러한 기능주의를 잠시 접어두고, ‘친밀성의 구조변동’이라는 사회학의 시각을 채택하면 어떨까? 사회학자 루만은 현대에 접어들면서 인간의 삶이 지나치게 복잡하고 우발적인 세계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고 말한다. 갈수록 세계는 개인에게 실제로 실현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가능성을 제출한다. 이러한 가능성은 어떤 행위도 잠재적으로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하지만 단순사회는 다르다. 다른 행위가 가능하다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기에 예전에 하던 대로 계속 행위한다. 기존 습속을 따라 그대로 행위해도, 큰 어려움이나 고통이 따르지 않는다. 어머니와 할머니 세대는 사랑-결혼-출산-육아-부모 봉양의 자연적 연계를 습속처럼 그대로 받아들였다. 딸 세대는 다르다. 사회가 복잡해짐에 따라 사랑이 출산과 육아로 자동으로 연결되지 않는 선택의 문제가 되었다.
사랑이 선택의 문제가 될 때 비로소 친밀성의 문제가 도드라진다. 둘 사이의 사랑을 확증하는 것은 친밀한 감정밖에 없다. 이를 상대방으로부터 확인하기 위해 게임에 들어간다. 사랑이 게임이 되려면 연인들이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거나 감추면 안 된다. 사랑은 상대방에 대한 앎이다. 서로 드러냄과 감춤의 게임이 치열하게 펼쳐진다. 이 게임을 하려면 규칙이 필요하다. 게임의 규칙은 복잡한 세계를 어떤 유의미한 방식으로 코딩함으로써 선택을 돕는다. 옛 게임 규칙은 성적 사랑을 남편 집안의 대를 이어줄 자식을 낳는 것으로 의미화했지만, 사회가 복잡해짐에 따라 그 힘을 잃고 있다. 하지만 이를 대체할 보다 일반화된 게임의 규칙이 발전되어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낡아빠진 게임의 규칙에 의지하도록 여성을 무지의 세계에 다시 가두려고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사랑하는 사람과 마음껏 드러냄과 감춤의 놀이를 할 수 있도록 에로틱한 공간을 많이 만들고, 그로부터 솟아나올 새로운 사랑의 의미론에 주목해야 한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