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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집단 등의 조직에서 부림을 당하는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 ‘똘마니’의 사전적 의미다. 일단 아이들이 들어서 별로 좋을 것 없는 표현인 것은 분명하고, 누군가 주의를 끌어보려고 이런 표현을 썼다고 해도 굳이 대꾸를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게다가 국정감사가 진행되는 와중에 다른 뉴스들을 모두 덮어버린 정치적 이슈가, 겨우 한 논객의 점잖지 못한 표현에 대한 국회의원의 소송 제기라면 다소 허탈하기까지 하다.
이 표현이 법적으로 명예훼손에 해당되는지 여부는 잘 알지 못한다. 그것은 법을 다루는 사람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또 이 논란의 당사자가 법을 공부하신 분이니, 법적으로는 결국 잘 해결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 문제가 정치적으로 잘 해결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논란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정치를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짚고 넘어갈 것은, 한국정치의 고질병이 되어버린 ‘정치의 사법화’ 문제다. 정치인이 정치적 사안을 법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시도는, 그 자체로 자신의 존재와 역할에 대한 부정이라서 별로 논할 만한 가치가 없다. 다만 정치의 사법화가 정치를 무력화시키고, 정치혐오를 가져오며, 결과적으로 ‘사법의 정치화’를 가져오게 된다는 점은 우려스럽다.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지는 큰 이유는 국회 안에 법률가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헌법을 헌법학자들만 모여 논의하고, 법을 법률가들끼리만 모여 제정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에 반대되는 잘못된 엘리트주의의 극단이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이 우리 사회에서는 이것을 전문가 중심의 정치라고 오해하고 있다. 사실 국회에 변호사들이 많아지는 이유는 그들이 입법 전문가들이기 때문이 아니다. 법률가라는 직함이 의사나 관료처럼 성공한 엘리트로 인식돼 공천이나 선거에서 유리하기 때문일 뿐이다. 국회에 가보면 알지만 입법에 필요한 전문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체계는 이미 잘 갖추어져 있다.
피상적인 문제점에 대해서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고, 이제 본질적인 부분을 살펴보자. ‘국회의원이 일개 시민의 발언을 명예 훼손으로 고소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하냐?’는 이 사건의 본질이 아니다. 여기서 핵심은 고소인이 그냥 국회의원이 아니라, 집권 여당이면서 국회에서 과반의 의석을 가진 정당 소속이라는 데에 있다. 누가 봐도 압도적 권력을 가진 그가 왜 한낱 시민을 고소했을까? 정답은 ‘고소인이 보기에는 자신이 가진 권력보다 그 시민의 권력이 더 크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행정부와 입법부를 모두 장악하고 있는 정당이 뭐가 그렇게 다급해서 몰아붙이느냐?’ 요즘 야당이 자주 하는 볼멘소리일 것이다. 그러나 여당이 느끼기에는 그렇지 않다. 여당은 일시적으로 장악한 정치적 권력이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를, 보수적 시민사회의 진지들이 언론계·관료계·종교계 등에 얼마나 깊고 넓게 뿌리내리고 있는지를, 참여정부와 그 이후의 정권에서 경험했다. 또한 이것은 트라우마에 가까운 것이어서 쉽사리 설명되거나 설득될 수 없다. ‘20년 집권’이라는 표현 역시 그러한 불안감의 표출이다. 그 정도는 해야 겨우 균형을 맞출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여당 의원들은 아마도 수면 위로 꼭대기만 솟은 빙산 위에 앉아 있는 심정일 것이다.
힘 있는 여당이 약자 코스프레를 한다는 비판이 맞는 것일까, 아니면 여전히 사회가 매우 보수적이어서 기존의 기득권을 어떻게든 개혁하려고 하는 시도가 정당한 것일까? 어느 쪽이 진실인지를 지금 당장 알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여야가 모두 약자를 자처하고 강자라고 규정한 상대를 향해 극단적인 공격을 가하는 것은 전쟁이지 정치가 아니라는 점이다.
정치학자 야스차 뭉크는 <위험한 민주주의>에서 지금이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가 유례없이 극심한 시기’라는 사실을 통계적으로 입증했다. 그 이유는 정치가 소수 엘리트 정치인, 관료, 자본, 사법권력 등에 포섭되면서, 민주주의가 포퓰리즘을 이용한 ‘경쟁적 권위주의’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그는 위기에 빠진 민주주의를 구출하기 위한 대안을 한 캐나다 정치인의 말을 인용해 이렇게 제시한다.
‘정치적 반대자들을 공격하겠다고 공언하지 말아야 한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정치인들이 적수(adversary)와 적(enemy)의 차이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적수는 꺾고 싶은 상대이며, 적은 말살해야 할 상대다. 정치를 적수와의 관계가 아니라 적과의 대립관계로 보면 민주정치는 작동하지 않는다.’
<이관후 경남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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