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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응급실에 앉아 있으면 안다. 그들의 위대함을. 사이렌을 울리는 구급차가 도착하고 나면 이내 망연자실한 표정의 가족들이 온다. 그들은 젊은 의사의 몇 마디에 눈물을 흘리며 털썩 주저앉거나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거기에 묵묵히 앉아 있으면, 내가 하는 일의 무용함을 느낄 수 있다. 그럴듯하게 꾸며 말하고, 쓰고, 때로는 정책에 개입하지만, 그것이 사람들의 삶에 터럭 하나라도 도움이 되는 것인지, 아니면 다만 내가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응급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눈앞의 사람들을 죽이고 살린다. 생명의 위급함 앞에서 그들은 신처럼 위대하다. 그들 앞에서 예외가 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이처럼 위대한 그들을 내가 병원 밖에서 만났을 때, 의사의 대표라는 사람이 말했다. “여러분 자식이 그렇게 고생해서 의대를 졸업했는데, 한 달에 1000만원 밖에 못 번다고 하면 여러분은 납득하겠어요? 당연히 2000만원, 3000만원 벌기를 원할 것 아닙니까?” 공공병원 설립에 관한 토론회였다.
대학에서 하는 농담으로 흔히 2가지 종류의 교수가 있다고 한다. ‘이상한 교수’와 ‘아주 이상한 교수’다. 어디서든 떠받들어 주니 자신이 고귀하고 존경스러워서 그런 줄 착각하고, 자기들끼리 잘난 척하는 집단에서 그 착각을 더 키우다가 타인에 대해 공감할 줄 모르고 이상한 생각과 행동을 하는데, 대체로 정도의 차이만 있지 대동소이하다는 나름의 자평이다. 아주 작은 분야의 지식을 가진 헛똑똑이들, 실은 멍청이들이라는 걸 인정하는 셈이다.
비단 대학에서만 그럴 리가 없다. 멍청한 교수처럼 멍청한 판사와 검사, 멍청한 엔지니어와 과학자, 멍청한 공무원, 멍청한 정치인, 멍청한 의사가 세상에는 가득하다. 자기 분야에서는 나름 중요한 일을 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한 발짝만 밖으로 나가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이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행차한다. 그럴수록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모르게 되는 것도 당연하다.
어떤 지위나 자격을 얻기 위해 더 많이 노력한 사람은 그에 응당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보상이 반드시 돈이어야 하고 무제한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그 보상에 일정한 사회적 특권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가끔 대형마트 주차장에서 아무렇게나 차를 세우고 가는 부모들의 뒤에서 아이들이 멈칫거리는 것을 본다. 십중팔구 커다란 고급차다. 그중 한 부모가 “우리는 그래도 돼”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아마도 그들은 그 지위를 얻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서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시험을 잘 본다고 해서 생각까지 옳은 것은 아니다.
‘개천의 용’이라는 말이 언제까지 유용할지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다. 요즘 들어 개천에서 난 용들이 개천으로 돌아와 미꾸라지와 피라미, 각시붕어를 남김없이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이것이 자신들이 용이 되기 위해 노력한 대가이므로, 공정한 결과라고 말한다. 또한 이것이 지난 수십 년간 우리가 ‘개천의 용’이라는 패러다임을 장려했던 결과다.
현재의 의료체계에서 전공의들에게 가해지는 비인간적 대우와 강요된 희생, 구조적 폭력은 심각한 문제다. 대형병원과 교수, 전문의, 개업의들의 목소리만 크게 들리는 세상에서 고난의 시절을 지나 받게 될 대가를 빼앗기게 된다고 생각하니 더 화가 났을 것이다. 지방을 사람들이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그저 의사가 내려오지 않는다고 비난만 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자신의 특권을 내세우기보다 더 많은 사회적 연대의 손을 잡는 것이 필요하다. 당장 옆에 있는 간호사들은 어떤가? 영원히 전공의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대다수 인문사회 전공 박사들은 어떤가? 헛똑똑이가 되기보다는 자신의 문제와 세상의 문제를 함께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진 사람들을 보고 싶다.
드라마 <서울의 달>에서 단칸방에 세 들어 살던 가족이 있다. 학교에서 늘 전교 1등을 하던 상국이는 어느 날 학교 앞에 찾아온 막일하는 아버지를 못 본 척하고 지나친다. 이 광경을 본 엄마가 회초리를 들어 아이를 혼내는데, 아버지가 아이를 데리고 달동네 꼭대기에 오른다. ‘공부 잘하는 우리 상국이는 나중에 판사, 의사 될 사람인데, 막일하는 아비를 부끄러워하는 것이 당연하지.’ 아비는 아들을 이해한다고 말했다. 그런 아비를 상국이는 꼭 안고 놓지 않았다. 나는 상국이가 어떤 의사가 되었을지 종종 생각해 본다.
<이관후 경남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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