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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서 학자로 산다는 것이 부끄럽다. 교수로 재직하는 것에도 자괴감이 든다. 국민대 교수회가 무려 61.5%의 반대로 김건희 논문 재검증도 하지 않고 조사위원회 조사자료 공개도 요구하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벌써 열흘이 지났지만 곱씹지 않을 수 없는 소식이다. 논문의 수준은 더 이상 거론하고 싶지 않다. 더 큰 문제는 표절이 분명하고 수준 이하인 논문을 통과시키고도 지도교수를 비롯해 교수들 다수가 이를 묵인, 방조, 은폐하고 있다는 것이다.
표절은 굳이 학술적 정의를 따르지 않더라도 표준국어대사전에 ‘시나 글, 노래 따위를 지을 때에 남의 작품의 일부를 몰래 따다 씀’이라고 나와 있다. 상식적 수준에서도 남의 작품을 베껴 마치 자신이 지은 것처럼 사용하는 행위라는 것이 자명하다. 한자로도 ‘겁박할 표(剽)’에 ‘훔칠 절(竊)’을 써서 노략질이나 도둑질을 의미한다. 영어인 플레저리즘(plagiarism)은 더욱 적나라하다. 라틴어 어원에서 이 단어는 아이를 유괴하거나 자유인을 노예로 매매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 범죄를 용인, 방조, 은폐하는 것이 집단 지성이라는 말로 포장될 수 있는가. 집단 지성으로 부르지 말자는 표절 피해자 구연상 교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학자나 교수라면 표절이 무엇인지를 모르지 않고 표절로 학위를 받을 수 없다는 것도 잘 안다. 집단 지식은 있지만 집단 지성은 사라졌다. 국민대 교수들 다수가 선택한 집단 지식의 행동이 무엇인지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보자.
첫째, 이익 앞에서 의(義)를 저버리는 견리망의(見利忘義)형이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유형으로, 기회를 엿보다가 이익이 되는 쪽으로 움직이는 기회주의자도 여기에 속한다. 국민대 투표에서 집단적 이익을 계산하고 이를 지키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표절이 범죄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고 이것을 단죄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것을 은폐함으로써 얻는 이익을 취하려 했다. 이 유형의 학자는 곡학아세의 위험이 있다. 은폐를 선택한 61.5%의 교수 중에서 이 유형이 가장 적기를 바랄 뿐이다.
둘째, 구차스럽게 목숨을 이어가는 구명도생(苟命徒生)형이다. 알면서도 권력이 두려워 행하지 못하는 소심형이다. 대세를 따르기는 하지만 기회주의자와 달리 이익이 아니라 정의를 기준으로 선택한다. 물론 무기명 비밀 투표에서조차 소신을 밝히지 않은 것은 구명도생이 의식적으로 작동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구차스럽다’는 ‘떳떳하지 못하다’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가난하여 궁색하다’라는 뜻이기도 하므로 용기가 부족한 소심형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셋째, 자기 몸을 상해 가면서 계책을 꾸며 내는 고육지계(苦肉之計)형이다. 궁지에 몰려 더 큰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방책을 따르는 사람이 여기에 해당한다. 사사로운 정보다 공정한 법 집행을 행하는 읍참마속과는 다르다. 김건희 논문의 표절을 파헤쳐 들어가면 줄줄이 나올 다른 비행과 불명예를 막기 위해 차악을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 국민대가 특수하거나 예외적인 경우일까. 한국 교수 사회 전체를 대상으로 투표를 실시했다면 다른 결과가 나왔을까. 국민대에 전체 교수 사회의 압축된 모습이 어른거린다. 교수 출신 공직 후보 청문회에서 자주 보았듯이 표절과 교직 수행에서 적지 않은 비리들이 드러났음에도 제대로 된 사과와 반성을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것이 그 한 증거다.
사회적으로 교수 집단은 기득권층에 속한다. 혁명의 고조기에 교수 사회의 다수는 마지막에 나타나 동승하는 경우가 많았다. 성실하게 진리를 추구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는 교수도 항상 있었지만 언제나 소수였다. 그러나 이 소수의 목소리가 울리는 파장은 크다. 적어도 둘째와 셋째 유형은 늦게나마 올바른 선택을 할 가능성이 크다.
제32대와 제33대 국민대 총동문회장을 지낸 장영달 전 우석대 총장도 이번 투표 결과에 크게 실망해 일제강점기 변절 지식인들에 비유하면서 “교수들이 권력과 재단의 노예들이라 선언한 것”이라고 일갈했다. 그 교수들에 그 제자들이 많아질까 두렵다. 이 사달이 교수 사회에 국한된 것이기를 바란다.
교수의 한 사람으로서 교단에 설 낯이 없어졌다. 비민주적, 비학문적, 비교육적인 것은 행하지도 말고 쓰지도 말며 가르치지도 말아야 하는 것이 교수의 덕목이다. 아직도 이 말을 할 면목이 있는가. 뭐 묻은 무엇이 뭐 묻은 무엇을 욕하는 것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이 글은 어느 한 교수가 제출하는 통한의 반성문이기도 하다.
<정병기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연재 | 정동칼럼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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