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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지도는 심심한 시간을 보내기 좋은 최고의 장난감이었다. 보드게임 ‘부루마블’을 통해 세계 여행의 기분을 만끽하듯, 지도를 훑어보며 그 지역의 공기를 느끼고 역사와 교감했다. 문경새재를 넘어 안동 하회마을을 구경하고 경주 불국사를 방문하는, 사회 교과서가 안내하는 루트가 보통의 상상 여행지였다.
지도에서 풀내음과 바닷바람이 사라지기 시작한 건 중학교 때다. 드라마 <제5공화국>이 보여준 1980년의 5월, 광주에서 벌어진 끔찍한 비극이 다섯 편의 에피소드로 그려졌다. 드라마 방영 이후 나의 지도 속 광주엔 핏자국이 어렸다. 광주뿐만이 아니다. 관심을 가지면 지도 곳곳에 아픔이 비친다. 여수, 순천, 제주…. 지도는 피와 눈물의 역사를 땅으로 분류해 놓았다.
슬픔은 아직도 지도를 적시고 있다. ‘과거’가 아닌 ‘현재’의 비극이다. 용산, 안산, 태안 등 지도에 쓰여 있는 지명 하나하나에 새로운 상처가 생기고 있다. 용산구에 이사한 첫날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철길 건너편 고층 빌딩 사이로 치솟았던 용산참사의 끔찍한 화마였다. 여전히 ‘안산역’을 볼 때면, 산업단지에서 일하는 친구와의 추억보다 세월호가 먼저 떠오른다. 연고 없는 태안은 나에게 그 자체로 김용균이다.
또 하나의 장소, 평택. 정리해고를 자행한 자본과 권력에 맞서며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을 이어온 쌍용자동차 노동자의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300㎏의 무거운 컨테이너에 깔려 세상을 떠난 평택항의 노동자 이선호씨의 소식이 들려왔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통과된 게 불과 4개월 전인데, 보란 듯이 참사는 계속 재발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듯 청년 노동자의 죽음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고, 사망한 지 일주일이 지나서야 세상에 알려졌다. 사람들은 노동자와 대학생, 지역과 서울, 산재와 그렇지 않은 죽음의 무게를 다르게 받아들이는 듯했다.
당연하게도 지역과 참사는 상관관계가 전혀 없다. 참사에 지역을 거론하는 것은 왜곡된 정보를 전달할 수 있기에 조심스러워야 함을 알고 있다. 지역의 이름보다는 참사가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한 제도의 개선을, 삶을 대신 살아가고 있는 유가족들의 치유를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어떤 지역 명칭이 아픔으로 각인될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현존한다. 대한민국의 모든 지역을 물들일 기세로 참사는 반복되고 있다.
나의 지도는 더 이상 슬픔으로 물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참사는 해결책이 없어서 막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안전관리를 위해 상식적인 수준의 비용을 지출하고, 제도를 어긴 기업이 있으면 제대로 처벌하면 된다. 우리 사회가 고작 넉 달 전의 이야기를 반복할 만큼 무능하지 않았으면 한다. 산재 사고를 절반으로 줄이겠다는 문재인 정부, 공약의 달성 시한은 이제 1년도 남지 않았다.
이한솔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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