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말이 무력한 시절이다. 물론 총칼이나 돈, 권력에 비하면 말은 언제나 무력했다. 그럼에도 한 시대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선 언제나 말이 필요했다. ‘민주주의’라는 말이 있었기에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이 한국 현대사를 관통해 이어질 수 있었다. 가까운 예로는, ‘미투’나 ‘성폭력’이라는 말은 젠더폭력에 대항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한국 사회를 변화시키는 동력이었다. 사회의 중심이 아닌 주변에서 머물던 말이 갑작스레 많은 사람들에게 공명을 일으키며 그 사회의 중요한 언어로 부상할 때, 비로소 사회는 새로운 시대로 건너가기 시작한다.

그렇기에 말은 힘없는 사람들에게 긴요한 무기다. 사회의 주변으로 밀려난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과 감각을 언어로 표현하면, 뜬금없고 공상 같고 서툴러서 긴 말이 필요해진다. 그래서 무시받기 쉽지만 그럴 때 필요한 것이 활동가나 연구자라고 불리는, 말을 다룰 줄 아는 ‘지식인’의 역할일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지난 몇 년간 한국 사회가 목도한 것은 말의 권위를 가진 지식인의 퇴락이었다. 조국 사태나 박원순 사태를 거대한 사회적 소용돌이로 만든 주범 중 하나는, 완고한 진영논리에 가담하는 지식인들의 말이었다. 서울대 학벌, 운동권 연줄 등으로 엮인 그들만의 세계 속에서나 통용될 말들이 버젓이 언론 지상에 등장했고, 두 진영 중 한쪽을 저주하면서 자신이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쓸모없고 해악만 가득한 언어의 공해가 사회를 뒤덮었다. 그렇게 많은 지식인들이 자해하듯 말의 권위를 무너뜨렸다.

문제는 지금도 그들의 말에 권위를 부여하는 관행이 온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진영논리에 삼켜진 지식인들은 여전히 지면과 SNS에 퇴락한 말들을 쏟아낸다. 이제는 좌파를 자임하던 운동단체까지 이재명이나 윤석열을 지지한다며 둘 중 한쪽을 택하라 말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거대 양당의 대선 후보를 보며 ‘뽑을 놈 없다’는 한탄이 난무하는 것은 정확히 그런 말들의 결과다. 상대 진영에 대한 증오와 적대로 무장한 언어들 사이에서, 정작 절박한 사람들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진영논리에 삼켜진 사회는 두 진영 어느 쪽도 반가워하지 않을 말을 무시해 버리거나, 진영의 이익에 맞게 듣고 싶은 대로 듣는다. 절박한 말이 닿지 않는다면 같은 말을 되풀이하게 된다. 어쩌다 답변이 돌아오면 현실을 모른다거나, 나중으로 미루자는 식이다. 그런 경험을 반복하면 지칠 수밖에 없다. 정작 필요한 말들은 밀려나고 언어 공해가 갈수록 자욱하게 미디어를 장식하고 있으니, 세상은 좋아지기보다는 더 나빠지고 있는 것 같다. 퇴락한 말들 사이에 사람들의 우울과 무기력의 신음이 가득하다.

이 퇴락의 시절에 말하기가 무슨 소용일까? 저들의 퇴락에 동참하지 않았다는 자기만족을 위해서라면, 아니다. 다만 침묵은 무책임이라 믿을 뿐이다. 절박한 목소리가 세상에 울려퍼지도록 퇴락에 지지 않고 더 악착같이 말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속, 말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언어를 가진 사람들의 의무는 시대와 불화하는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일 테니까. 언젠가, 지금의 시대가 이해하지 못하는 주변의 경험과 감각을 새로운 언어로 선포하기 위하여.

최성용 청년연구자

'일반 칼럼 > 직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둑맞은 청년  (0) 2021.11.18
너는 네 생각보다 강하다  (0) 2021.11.16
청각장애 배달노동자의 갈망  (0) 2021.11.09
횡설수설  (0) 2021.11.04
급변하는 대학 청년문화  (0) 2021.11.02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5/07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