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성탄절이 1주일 남았다. 지난 1월 국내에서 첫 감염자가 발생한 코로나19 위기는 지금 최정점에 달했다. 코로나19는 화재, 수해, 태풍 등과는 다른 재난이었다. 어려움이 닥치면 사람은 서로 돕기 위해 뭉치기 마련이지만, 코로나19 상황은 달랐다. 생면부지의 재난 앞에서 따로 흩어져서 홀로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그래선지 코로나19 위기는 공동체란 말을 되묻게 한다. 한국인의 절반 이상이 공동주택인 아파트에 살고, 직장이건 동호회건 각각의 커뮤니티에 속해 있다. 공동체는 서로 기댈 수밖에 없고, 연대해야 한다는 생각을 바탕에 깔고 있다. 우리는 서로를 붙들어주고 있는가? 코로나가 던진 질문이다.
예수가 2000년 전 세상에 던진 질문도 바로 공동체에 관한 것이다. 누가 신의 자녀인가. 누가 너희의 형제인가, 누가 너희의 이웃인가?
공동체란 구성원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빵을 챙겨주며, 말할 권리를 주는 결사(結社)다. 예수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신의 자녀로 대했고, 기회 있을 때마다 그들을 먹였으며, 민초들의 애환을 들어주었다.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제자들과의 행사도 ‘최후의 만찬’이었다. 예수는 심지어 자신의 살과 피를 빵과 포도주로 비유했다.
성서학자들은 이 만찬을 고대 지중해 문화권의 공동식사 제도와 비교한다. 공동식사는 공동체를 강화하는 방법 중 하나였다. 음식을 함께 먹으며, 그들의 권리와 책임을 확인하고, 연대를 다지는 행사다. 예수보다 약 4세기 전에 살았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크레테와 스파르타, 카르타고의 공동식사 제도를 비교했다.
“공동식사를 위한 모임의 비용은 크레테에서처럼 공공기금에서 지불되어야 한다. 그러나 스파르타의 규칙은, 어떤 시민은 너무 가난해서 비용을 부담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각자가 자기의 몫을 가져오도록 되어 있다. 당연하게도 입법자의 의사와는 정반대의 결과가 되고 말았다.”
예수의 시대에 지배자와 지주들은 농민을 착취했다. 농민들은 생존을 위한 먹거리마저도 부족해 농토를 떠나 도적 떼가 됐다. 소요와 봉기도 곧잘 일어났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엘리트들은 제나름대로 정의를 부르짖었다. 바리새파는 법을 내세웠고, 제사장의 후손인 사두개파는 로마 집권세력과 친분이 두터운 성전주의자였으며, 에세네파는 어지러운 세상을 떠나 경건을 추구했다. 세상을 바꿔보겠다고 일어섰던 열심당도 있었다.
그들이 보기에 예수의 정의는 비합리적이었다. 예수는 가난한 자들의 몫을 다른 방식으로 챙겼다. 포도원 비유를 보면, 새벽부터 일한 일꾼에게나 뒤늦게 와서 일한 일꾼들에게 똑같은 일당을 줬다. “제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마태복음)
나중에 온 일꾼들은 게으른 사람이 아니라 일자리를 못 구했던 사람들이었다. 어리거나 늙었거나, 기술이 부족하거나, 힘이 달리는, 경쟁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포도원 주인이 그들에게 나눠준 몫은 다른 사람의 품삯과 똑같았다. 예수의 분배정의는 능력이나 성과를 바탕으로 몫을 나누는 게 아니라, ‘사람에 값하게’ 몫을 준 것이다.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기업은 도산하고, 노동자는 직장을 잃고, 취업준비생들은 일자리가 구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지금은 보이는 것은 일부분이다. 태풍이 지나가면 재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듯이, 코로나19 이후 외환위기와 금융위기 못지않게 많은 사람들이 추락할지도 모른다. 서서히 도드라지는 상처도 있을 것이다. 외환위기 세대가 10년 뒤까지 고통을 받듯이, 입학 동기들 얼굴도 모른 채 1년을 보낸 대학 신입생이나 타인을 통해 발달 학습을 하는 아이들에게도 어떤 영향을 미칠지 현재로선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위기가 있을 때마다 공동체의 가장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추락했다. 시간과 장소에 구애 없이 어디서든 ‘접속’이 가능하지만 공동체의 위기는 더 심화됐다. 초연결시대라는 말이 무색하게 사망한 지 몇 달이 지나서야 알려지는 고독사도 심심찮게 보도된다. 삶과 생활과 행동이 연결되지 않은 접속은 결코 공동체를 강화해주지 않는다. 예수처럼 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들의 외침을 듣고, 자리를 내주며, 밥을 나누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최병준 후마니타스연구소장·논설위원
'일반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NGO 발언대]우리는 어떤 것도 양보하지 말자 (0) | 2020.12.21 |
---|---|
[기고]기자단, 해체 수준의 성찰이 필요하다 (0) | 2020.12.21 |
[기고]저출산·고령사회 대응의 ‘골든타임’ (0) | 2020.12.18 |
[학교의 안과 밖]회복력을 키우는 시간 (0) | 2020.12.17 |
[이봉수의 참!]기자 출신임이 부끄럽다 (0) | 2020.1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