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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이 길을 먼저 지나간 것 같다. 밤새 내리던 비 그치고 물 고인 땅바닥에 함부로 널브러진 잔돌들, 누군가 쪼그리고 앉았다 간 자리인 듯 길섶 한쪽이 납작 눌려 있다. 안이든 바깥이든 잠시라도 젖었던 자리는 어디나 물컹하다. 툭하면 날 주저앉히던 세상 또 어디에 저리 얼룩진 자국이 남아 있을까. 새벽 탄천은 가로등 불빛조차도 검고 깊어서 미처 그 속을 헤아리지 못한다. 패인 웅덩이에 갇힌 물처럼 어디로도 흐르지 못하는 마음만 어디로 나 있는지 모를 물길 자국을 말없이 따라갈 뿐이다.
박완호(1965~)
설악산에서 첫눈 소식이 들려왔지만, 사람들의 도시에는 밤새 비가 내리다 새벽 어스름에 그쳤다. 지상으로 뛰어내리기 전의 붉은 단풍잎도, 바람에 살랑거리는 길가의 억새와 강아지풀도 흠뻑 젖었다. 군데군데 “물 고인 땅바닥”에는 위쪽 어딘가에서 굴러온 잔돌들이 “함부로 널브러”져 있다. 아직 꺼지지 않은 “가로등 불빛”에도 탄천은 그 속을 드러내지 않는다.
“길섶 한쪽이 납작 눌려 있”는 흔적을 발견한 시인은 누군가 그곳에 “쪼그리고 앉”아 한참을 울다 갔을 것이라 짐작한다. 마음이 “물컹”해진 시인은 “툭하면 날 주저앉히던 세상”을 떠올린다. 사람들이 오가는 길가에 앉아 운다는 건 마음이 고여 있다는 것이다. 물이 흐르지 않으면 썩듯, 마음도 고이면 썩는다. 상처가 깊은 사람은 함부로 울지 않고, 누군가 앞서간 길을 “말없이 따라갈 뿐”이다. 시냇물은 밖으로 소리 내 흐르지만, 강물은 속으로 소리 없이 흘러 바다로 간다.
<김정수 시인>
오피니언 詩想과 세상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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