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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푹 대지를 녹일 듯한 팔월의 태양
나뭇잎 하나 까딱이지 않는 음울한 분위기
농촌에서, 도회에서, 어촌에서
꽉꽉 메어 나오는 이 겨레의 아우성
진두까지 짓밟힌 비명은 무슨 일일까
무슨 일일까.
정말이다
이글이글 끓는 도가니의 쇳물처럼
장부의 염통에 서린 핏줄기의 나머지로
힘있게 올렸든 손가락은 권반을 눌렀으나,
산마루에 올라 고함을 쳤으나
피 묻은 청춘의 노래가 만가보다도
더 애끓게 뒤따르는고나.
팔월의 태양아
우리를 녹일 테면 녹여보아라
우리들 참일꾼은
음조를 바꾼 팔월의 장엄한 노래로
너를 놀래줄 것이다.
황순원(1915~2000)
황순원은 1931년 17세의 나이에 시 ‘나의 꿈’을 ‘동광’ 잡지에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나기’를 쓴 소설가로 널리 알려졌지만, 소설보다 시를 먼저 썼다. 평생 시와 동시 160여편을 발표했으며, 말년에는 시만 썼다. 첫 시집 <방가>는 1934년 동경학생예술좌 이름으로, 일제의 심장 동경에서 발간됐다. 동경학생예술좌로 시집을 낸 건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함이었지만, 이듬해 여름방학 때 귀국해 집에 갔다가 체포돼 29일간 구류를 살았다.
이 시가 쓰인 1932년엔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켰으며,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있었다. 일제(태양)의 기세가 사나웠지만, 독립을 위한 “겨레의 아우성”은 “농촌에서, 도회에서, 어촌에서” 울려퍼졌다. “음조를 바꾼 팔월의 장엄한 노래로 너를 놀래줄 것”이라는 예언은 적중했다. 시인은 해방의 기쁨을 “부르는 이 없어도/ 찾아나서면/ 모두 잊을 뻔한 내 사람뿐”(‘그날’)이라 노래했다. 일제를 겨냥한 18세 젊은 시인의 울분과 저항, 패기가 놀라울 뿐이다.
김정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