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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중앙정보국(CIA) 홈페이지에서 김진명을 검색하면 미국의 반대로 핵무기 개발에 실패한 남한이 북한과 힘을 합쳐 일본을 핵무기로 굴복시킨다는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관련 이야기가 나온다. 12년 전에 작성해서 켜켜이 먼지가 쌓인 소개글을 읽다 김진명이 당시 북한에서 가장 인기가 높았던 남한의 소설가라는 사실을 새롭게 알았다. 하지만 북한에서만 김 작가의 명성이 자자한 것은 아니었다. 1993년 3권으로 출간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는 실제 그 한 해에만 한국에서 무려 300만부 이상 판매된, 말하자면 핵무장 인식 관련 ‘한국학’ 교본이었다.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조용히 자고 있던 핵무장론을 흔들어 깨웠다. 노정객(老政客)은 미국의 핵우산 제공과 주한미군의 핵무기(전술핵) 반입이 불가능한 경우를 전제로 “북한이 끝까지 핵을 가져간다면 우리도 핵무장에 대해 생각을 다시 해볼 필요가 있지 않나”라고 슬며시 핵무장 군불을 지폈다. 때마침 문재인 정부의 원자력 추진 잠수함 개발 동기가 “미국이 핵연료 공급을 반대하면 원자력 추진 잠수함 사업은 좌초된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이 사업 좌초의 책임을 미국에 돌리는 방식으로 반미 감정을 일으켜 지지층 결집과 세력 확장에 이용할 수 있다”고 천기를 누설한 듯한 글도 나왔다(신동아 12월호). 핵무장은 보수와 진보 모두에게 통하는 독특한 소재다. 여론 역시 그러하다.
아산정책연구원의 지난 11월 여론조사 자료를 보면 응답자 1000명 중 독자 핵무기 개발 지지가 48.2%, 미국 전략 핵무기의 한반도 배치 지지가 22.2%로 나타났다. 응답자 중 70% 이상이 어떤 형태로든 한국에 핵무기가 있어야 한다고 답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여섯 차례 핵실험을 한 북한이 미국 본토까지 도달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까지 완성할 경우 미국의 한반도 안보공약이 구조적으로 약화될 수밖에 없다는 공포감과 한국이 핵무장을 하거나 전술핵을 들여놓아야만 북한 도발 시 동맹국 미국을 연루시킬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반영한 결과다. 핵무기 없는 한국의 고육지책인 셈이다. 그러나 한국의 핵무장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미국이 한국의 핵무기 개발을 용인할 리가 만무하다. 한국 핵무장은 분명 일본 핵무장으로 이어질 것이며, 이는 미국은 물론 중국과 러시아 모두 원하는 구도가 아니다. 핵비확산 매파들로 포진한 바이든 행정부가 한국의 핵무장은커녕 원자력 추진 잠수함에 필수적인 농축 권한조차 허용하지 않을 것이 확실하다.
대신에 트럼프가 2017년에 서명한 ‘2018 국방수권법’에 따라 한국이 반대하지 않을 경우 미국이 한반도 해역을 포함한 동아·태 지역에 핵잠수함을 포함한 미국 해군 함정들이 필요시 핵무기를 탑재하여 한반도 주변을 항행할 수 있다. 여기에다 최근 미국 샌디아국립연구소는 신형 B61-12 저위력 전술핵폭탄의 적합성 시험을 F-35A 스텔스 전투기에서 최초로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런 미국의 조치가 코로나19 등으로 원치 않는 인고(忍苦)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김정은과 북한 군부를 불필요하게 자극하여 핵무장과 미사일 개발이 급속히 빨라질 수 있다. 그럴 경우 초박막 비핵화 얼음장이 쪼개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김정은의 자발적 비핵화가 난망한 상황임에도 불구, 한반도 미래에 대해 담대하고도 용기 있는 결단을 내려야 할 때다. 핵무장이 북핵 대응책으로 쉽고도 즉자적인 답이 될 수는 있어도 한반도 미래를 감안할 때 핵무기주의 사고(思考)는 머리에서 지워야 할 환상이다. 행여나 과거 ‘과학자의 호기심’으로 비밀리에 농축실험을 하다 발각된 것처럼 또다시 이와 유사한 시도를 한다면 이야말로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고, 되돌릴 수 없는 국가적 재앙(disaster)이 될 것이다. 남한판 CVID이다.
이병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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