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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오랜만에 다시 듣는다 나는

꿈꾸던 먼지, 날뛰던 빗방울들이 하늘로

치솟아오르고 굶주린 손끝에서 부서지는

물 젖은 빵조각들

바득바득 살아왔구나, 너무나도

가늘어진 내 허리춤

편안한 잠을 못 들게 하던

지친 몸속에

아직 살아 꿈틀대는 정욕들, 들

나에게 남은 마지막 찌꺼기

오랜만에 듣는다, 나는 세상에

가라앉아 불안한 꿈의 끝길을 바라보며

풀어진 빵을 삼킨다

조현석(1963~)

“오랜만에 다시 듣는” 노래는 이글스의 ‘호텔 캘리포니아’다. 발표한 지 45년이나 된 올드 팝송이다. 화려한 기타 연주에 이어 허스키한 노래가 흘러나온다. 어두운 사막 고속도로를 달려와 화려한 호텔 캘리포니아에서 와인을 찾는 가사와 달리 지친 나는 “젖은 빵조각”을 먹는다. 허리춤이 가늘어질 만큼 “바득바득 살아왔”는데 삶이 나아지기는커녕 더 열악하다. 몸은 몹시 피곤한데 잠들지 못한다.

서울이라는 아주 낯선 도시에선 영화 <시네마 천국>의 토토처럼 꿈을 꿀 수도, 더 좋아질 것이란 희망을 품을 수도 없다. “지친 몸속에” 본능만 “살아 꿈틀”댄다. 곁엔 아무도 없다.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을 나 혼자 오롯이 견뎌야 한다. “당신은 절대 떠날 수 없어요”라는 마지막 가사처럼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사람만이 절망을 딛고 다시 일어선다.

김정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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