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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좋아하던 선배와 함께 식사할 기회가 생겼다. 그는 후배를 정중하게 대하고, 어리석은 후배의 말이라도 귀담아들으며 배우려고 노력하는 좋은 선배다. 사회적 약자, 특히 노동자 인권 문제에 관심이 많은 지식인이기도 하다. 대화는 주로 그의 관심사인 거리로 밀려난 노동자 이야기, 그들을 핍박하는 대기업과 방관하는 정치를 향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그러다 ‘성소수자’ 이야기로 연결되었다. 나는 평소 그에게 혹은, 개혁이나 진보적 의제에 몰두하는 선배들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선배가 지금까지 개혁 과제나 노동 운동에 헌신했듯, 이제는 성소수자 의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힘을 모을 때라는 이야기를 쏟아냈다.
평소처럼 맑은 눈으로 나를 응시하며 진지하게 이야기를 듣던 그는 내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이렇게 말했다. “성소수자 운동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을 앞세우면 노동 운동하기 힘들어져요.” 지금은 노동 운동에 더 집중할 때라는 말이었다. 예상은 했으나 허탈했다. 그에게 다시 말했다. “성소수자도 노동자예요. 성소수자 인권을 위한 일은 노동자를 위한 일이기도 해요.” 그날의 대화는 서로 간 예의를 잃지 않았으나, 차이는 선명하게 인식한 채 끝났다.
선배에게 그때 다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어 이 글을 쓴다. “세상에 성소수자이기만 한 사람은 없다. 또한 ‘정상’이기만 한 사람도 없다.” 성소수자 임금 노동자와 청년을 인터뷰한 희정 작가의 책 <퀴어는 당신 옆에서 일하고 있다>의 한 대목이다. 작가의 통찰처럼 세상에 하나의 정체성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나만 해도 노동자이면서 자유기고가이고, 한 정당의 당원이고, 개신교인이라는 몇 개의 정체성을 가졌으며 이 각각의 정체성은 내 안에서 조화를 이루기도 하고, 불화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선배가 ‘성소수자’로만 알고 있는 누구도 성소수자로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일상적 존재이며 학생이거나 노동자이다.
그래서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이은용, 김기홍, 변희수를 ‘성소수자’로서 기억하는 것만큼 작가 이은용, 음악 교사 김기홍, 육군 하사 변희수로 기억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들의 삶이 어떠했는지 구체적으로는 모른다. 다만 그들은 ‘삶’을 원했으나 그것을 잃었고, 우리는 우리 곁에서 함께 살아가며 각자의 영역에서 충실히 제 몫을 감당하고자 했던 작가, 음악 교사, 군인을 잃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세상에 성소수자이기만 한 사람은 없다. 성소수자는 어디에나 있다. 성소수자 인권 문제를 ‘소수’ 영역에 가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 문제이고, ‘다수’의 영역에서 함께 풀어야 할 사회적 의제다. ‘차별금지법’으로 대표되는 법과 제도의 문제이기도 하고, 노동자 인권 문제이기도 하고, 여성 인권에 부합하는 문제이기도 하고, 사회복지 차원에서 풀어낼 문제이기도 하다. 이 당연한 사실을 망각하니 살아 있는 사람은 ‘없는 존재’가 되고, 세상을 떠난 이들은 ‘비극’ 속에 박제되는 일이 반복된다. ‘없는 존재’가 ‘있는 존재’로 함께 살기 위해, ‘나중에’ 영역으로 편리하게 밀어내거나 ‘안 볼 권리’를 주장하는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 질문을 끌어안고 혐오에 맞서 싸우는 ‘우리’를 만나고 싶다.
오수경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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