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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사논문 초고를 쓰던 초여름, 밤이면 파트타임 학원 강의 면접을 보러 다녔다. 그 밤들이 떠오른다. 논문 쓸 시간을 위해 조금 일하고 적게 벌고 싶던 나는 많이 일하고 적당히 받길 원하던 원장님들과의 협상에 번번이 실패했고, 조교실로 되돌아와 울기도 했다. 그때 한 친구가 나중에 갚으라며 돈을 조금 빌려주었다. 그 도움으로 방학 동안 초고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렇게 주로 생활비는 알바로, 학비는 조교장학금으로 충당하던 중 박사과정 들어가던 학기에 문제가 생겼다. 등록금과 달리 입학금은 조교장학금 나오기 전에 납부해야 했기 때문이다. 푼푼이 모은 걸 전부 합쳐도 액수가 부족했다. 입학 취소될까봐 발을 동동 구르던 나를 지도교수님이 불러 앉히고, 모자란 부분을 대신 내주겠다 하셨다. 박사과정 중엔 어느 선배가 대학원 총학생회 집행부로 일하도록 주선해주었고, 덕분에 학비를 일부 지원받으며 ‘공부하는 창고방’이라 불린 공간에서 유사가족 같던 이들과 공부할 수 있었다. 거기서 지낸 일 년은 매일이 시트콤 같았다. 아침마다 오늘 어떤 재미난 에피소드가 생길지 설레며 잠을 깨었다.
이렇듯 힘들다, 힘들다 하면서도 먹고살 길이 실제 끊긴 적은 없었다. 그래서 나 하나 건사할 길은 어떻게든 열리겠지 막연한 믿음을 가졌던 것 같다. 그 길이 안 보이던 시기가 한 번 있었는데, 박사후연구원 생활을 마칠 무렵이었다. 근사한 장학증서를 프랑스대사님께 수여받았건만 막상 손에 쥔 연구비는 파리 물가로는 생활보조금 수준이었다. 방세 저렴한 수녀원에 거주하며 아껴둔 돈 또한 초여름에 귀국할 때쯤 바닥났다. 새 학기가 시작되어 첫 시간강사료를 받을 9월 말까지 그야말로 생계가 막막했다.
하루는 편의점 가서 저녁으로 먹을 삼각김밥을 고르는데 아주머니 한 분이 카운터에서 만원 뭉치를 잔돈으로 바꿔 달라 하셨다. 근처에서 장사하시다 거스름돈이 떨어졌던가 보았다. “돈만 바꾸고 가면 아가씨(알바생)한테 미안하니까”라며 천 원짜리 복권을 구입하셨다. 그걸 본 나는 알바생에게 “그거 저도 한 장 살게요” 했다. 로또도 아닌, 복돼지가 그려진 즉석복권 “스피또”. 꿈꾸면 항상 개꿈인 데다 경품 당첨 경험조차 없었지만, 순간 ‘9월 말까지 버티도록 4등 당첨의 요행이 혹시 주어지지 않을까’ 싶었던 거다. 동전을 꺼내어 스크래치 면을 긁어보니 역시 ‘꽝’이었다. 그때 엉뚱하게도 안도감이 들었다. 역시 꽝인 것을 보니 뭔가 따로 마련되어 있나보구나 싶어서. 즉석복권 4등 10만원의 응급처치 없이 먹고살 방편 말이다. 과연 며칠 안 되어 한 선배가 연락을 주셨다. 몇 달 동안 프로젝트를 보조할 임시연구원을 찾는데 불현듯 내가 떠오르셨다 했다. 그리하여 개강 전까지 삼각김밥 외에 자두와 아이스커피도 먹고 마시게 되었다.
과정이 어떠했든 난 원하던 공부를 오래, 깊게 할 수 있었고 이제 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런 조건이 허락된 삶 자체가 드물단 점에서 특혜를 누린 이에 속할 거다. 따라서 내 경우를 일반화해 ‘우리’가 이러해야 한다고 감히 말할 수 없다. 다만 이걸 말하고 싶었다. 예전 그때 복권을 긁은 후 도리어 안도했던 것은 내가 낙천적이거나 그릇이 큰 사람이어서가 아니었다. 길이 어떻게든 이어지고 일용할 양식이 바닥나지 않은 것은 어깨에 고귀한 표징이 찍혀 있어서가 아니었다. 공부하는 내내 누군가의 우회적 혹은 직접적 도움을 받아서였다. 여기 미처 다 적지 못한 고마움들. 그걸 가져본 한 사람은, 그렇다면 ‘꽝’에 절망감 대신 막연한 안도감을 느끼는 순간을 한 사람이라도 더 경험하는 세상을 지향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를 위해 사회적 보호망을 만들려는 정치를 알아보고 지지하든, 그 과정에서 부조리와 맞서 싸우는 이들께 힘을 보태든, 눈앞의 누군가에게 호주머니를 끌러놓든, 무엇이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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