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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캄한 우주에 버려진 것 같은 순간이 있다. SF물의 외연을 지닌 영화 <그래비티>는 그런 내적 고통을 은유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극중 스톤 박사의 고난을 야기한 대상은 미처 예측할 수 없었고 설령 알았다 할지라도 무력하게 당해야 했을, 우주 탐사 중 날아든 인공위성 파편들이었다. 하지만 진실로 견디기 어려웠을 아픔은 폭력적인 폭발이 지나간 이후 찾아왔다. 숨쉬기 힘들던 중에도 엄마 치맛자락처럼 붙들어 쥐었던 선배비행사 맷과의 끈이 끊기어 홀로 남겨지면서였다. 그녀는 이제껏 매뉴얼로만 배워 알던 과학지식들을 복기하며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지만, 한 번 위태롭게 기울어진 상황이 블록버스터 액션영화에서처럼 일순간 호전되지는 않는다. 이 터널을 지나면 웃을 수 있기를 희망하며 꺾인 무릎을 일으켜 세워도 저편에는 다른 어두움이, 그 너머로 또 다른 난관이 아귀처럼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다. 산소가 소진되기까지 기다리기보다 차라리 ‘지금’ 죽고자 산소공급 스위치를 내린다. 그때 실종된 줄 알았던 맷이 거짓말처럼 문을 열고 들어온다. 본인이 우주에서 제일 오래 유영한 기록을 세웠을 거라고, 늘 해오던 너스레를 부리며 말이다. 그 장면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가 살아있음에 안도해서나, 기적적 조우에 감동받아서가 아니라 그것이 주인공의 환영임이 분명해 보여서였다. 운명의 폭력에 휘둘리느니 생명의 스위치를 스스로 내리고 싶은 어떤 순간, 내면 깊숙한 곳 혹은 세상 너머로부터 타전된 각별한 존재의 환영과 환청이 살아내라며 추동한 것이다. 그녀는 재차 지구귀환을 시도한다.

우주선이 슝 날아가 지구에 곧장 안착하는 기적은 역시 일어나지 않았다. 난관은 다음 장면에도, 그다음 장면에도 이어졌다. 세속적 의미의 운명이란 가지지 못한 자와 이미 잃은 자에게 그악하고 무자비하니까. 마지막 시도 직전 스톤 박사는 중얼거린다. “이제 가능성은 둘이겠지. 돌아가서 멋진 모험담을 들려주거나 아니면 앞으로 10분 안에 불타 죽거나. 어떤 경우든 엄청난 여행일 거야.” 그리고 그녀의 두 발은 마침내 지상에 닿았다.

몇 주 전 혈액검사 이상소견으로 골수검사를 했고, 재생불량성 빈혈 진단을 받았다. 심각하지 않게 여겨지는 병명과 달리 희귀난치성질병으로 분류되며, 원인 미상이라 했다. 담당 의사선생님께서 30년 넘게 진료하며 단 두 차례 보셨다는 ‘저절로 나아진’ 임상케이스가 내 경우였으면 싶고, 험한 길에선 하느님이 나를 걷게 하는 대신 품에 안아 건넸으면 좋겠다 싶었다. 하지만 아마 몇 달 안으로 토끼혈청이란 걸 투여하는 치료가 시작될 테고, 거기 몸이 반응하지 않으면 기증자를 만나기 어려운 데다 숙주반응 부작용이 뒤따른다는 조혈모세포이식을 고려해야 할 테다. 겁이 난다. 투병 과정이. 내겐 생의 전부인 공부하고 가르치는 일과 사랑하는 학생·동료공동체로부터 벗어나, 이삼십대를 헌신해 가까스로 빠져나왔던 어떤 어둠으로 다시 들어가는 건 아닐지.

이 글을 읽고 계신 이들 가운데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더 독한 병으로 투병 중인 분과, 피처럼 소중한 대상을 떠나보낸 분과, 이번 경제위기로 생계를 잇기 어려워진 분과, 미처 헤아리지 못할 다른 이유로 죽음의 시간을 관통 중인 분이. 캄캄한 우주에 버려진 것 같은 상황은 단숨에 호전되지 않을 것이다. 터널 끝에 또 다른 난관이 입 벌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세상은 가지지 못한 자와 이미 잃은 자에게 그악하고 무자비하니까. 그렇지만 난 믿는다. 생의 스위치를 내리고 싶을 만큼 힘들 때는 -스톤 박사를 찾아온 맷의 환영과 환청처럼- 그 시기를 넘길 힘과 위로가 내면에서든 외부에서든 우리에게 주어질 것임을. 여행을 계속하다 마침내 두 발 닿게 될 그곳이 지상이기를. 단단한 땅을 딛고 선 그대와 내가 “감사해요” 말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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