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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상반기에 가장 주목받는 두 개의 말은 ‘코로나19’와 ‘한국판 뉴딜’이다. ‘뉴딜’은 미국 프랭클린 루스벨트 정부가 1929년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추진한 정책 패키지를 지칭한다. 한국판 뉴딜이란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이 가져온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 상황을 고려한 정책을 추진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한국판 뉴딜의 일차 버전이 제시된 것은 6월1일 제6차 비상경제회의에서였다. 구체적으로 한국판 뉴딜은 고용안전망 강화라는 토대 위에 ‘디지털 뉴딜’(D·N·A. 생태계 강화, 디지털 포용 및 안전망 구축, 비대면 산업 육성, SOC 디지털화)과 ‘그린 뉴딜’(도시·공간·생활 인프라 녹색 전환, 녹색산업 혁신 생태계 구축, 저탄소·분산형 에너지 확산)을 양축으로 하여 추진된다. 7개 분야의 25개 핵심 프로젝트에 2025년까지 총 76조원을 투자할 계획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한국판 뉴딜에 두 가지 생각을 덧붙이고 싶다. 첫째, 한국판 뉴딜은 ‘뉴딜’ 본래의 정신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동시대인들과 뉴딜에 대해 논쟁을 벌인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보수주의자들은 정부가 시장에 과도하게 개입한다고 비난했고, 좌파들은 뉴딜이 자본주의의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루스벨트를 지지했던 진보적 자유주의자들만이 뉴딜이 대공황을 극복할 의미 있는 개혁이라고 옹호했다.
한국판 뉴딜에 대해 현재 진행되는 중간 평가도 이와 유사하다. 한편에선 재정지출 확대를 핵심으로 삼고 있는 정부의 뉴딜이 결국 재정건전성을 악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다. 다른 한편에선 1960년대부터 시작된 개발주의 산업정책의 일환에 불과하고, 구조적인 패러다임 전환의 고민이 보이지 않는다고 논평한다. 7월 중 한국판 뉴딜의 최종 버전이 나온 다음에야 제대로 평가가 이뤄지겠지만, 보수와 진보로부터의 이러한 비판은 경청할 만하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뉴딜이 복합 개념이었다는 점이다. 뉴딜은 2차에 걸쳐 진행됐다. 1933년 시작된 제1차 뉴딜이 단기적인 경제회복에 주력했다면, 1935년 시작된 제2차 뉴딜은 전반적인 경제·사회개혁에 초점을 맞췄다. 21세기 현재의 시점에서 돌아보면, 진보적 자유주의 기획으로서의 뉴딜은, 역사학자 앨런 브링클리가 지적하듯, 경제에 대한 연방정부의 적극적 개입, 정교한 복지제도, 강력한 관료제, 대규모 정부지출 등을 포함하고 포괄한다.
이러한 미국판 뉴딜의 핵심에는 사회적 대타협으로서의 사회계약이 놓여 있었다. 다시 말해, 뉴딜은 정부·기업·노동자가 사회계약을 맺게 함으로써 생산성과 형평성을 동시에 제고시키려는 ‘정치적 교환’을 추진했다. 1935년 제정된 와그너법은 이를 위한 제도적 장치였다. 우리 사회에서 구조조정을 앞두고 노사정 대타협을 이루기가 결코 쉽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정규직은 물론 비정규직 그리고 플랫폼 노동자의 고용 및 생활 안정을 위한 사회적 대타협을 추진하겠다는 뉴딜 본래의 정신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둘째, 한국판 뉴딜에서 ‘한국판’이란 특수한 조건 또한 주목해야 한다. 경제학자 이일영에 따르면, 1990년대 이후 한국경제 모델은 동아시아 생산네트워크에 연결된 노드를 중심으로 한 성장체제였다. 재벌대기업, 수출산업, 수도권, 정규직 노동 등이 이 가치사슬의 핵심부에 위치해 성장을 이끌었다. 그런데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저성장과 불평등 추세가 고착화됐고, 제4차 산업혁명의 도전을 받게 됐다.
정부는 한국판 뉴딜이 이중적 목적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위기 극복과 일자리 창출이 하나라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미래 대비가 다른 하나라는 것이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목표를 위한 전략과 정책 마련에서 앞서 말한 한국적 특수성을 제대로 반영해야 한다는 점이다. 디지털 뉴딜과 그린 뉴딜에 더해 전통적 제조업 르네상스, 미래차·반도체·바이오 육성 그리고 지역경제 활성화를 통한 균형발전 전략이 한국판 뉴딜의 최종 버전에는 포함돼야 할 것이다.
미국판 뉴딜은 ‘구호·회복·개혁’을 자신의 목표로 내걸었다. 이 목표가 갖는 가장 큰 의의는 개인의 삶과 운명을 경제의 불안정성 및 예측불가능성으로부터 정부가 나서서 보호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한국판 뉴딜이 이러한 희망을 안겨줄 수 있기를 소망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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