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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를 배우며 궁금한 점이 있었다. 평소 안 쓰던 근육을 사용하는 고된 동작들이 끝나면 잠시 누워 휴식을 취한 후, “팔로 바닥을 누르며 천천히 일어나라”는 지시에 따라 몸을 일으킨다. 누워서 쉬다 일어나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방법을 정해주는지 여쭤봤다. “연세 드시거나 허약한 분들 중엔 그 간단한 움직임조차 무리가 되는 경우가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얼마 전 집안일을 하다 허리를 크게 다쳤다. 단순한 뒤척임과 자세 바꾸는 일에도 엄청난 고통이 뒤따라 더럭 겁이 났다. “혹시라도 이 고통이 영구한 것이 된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장애를 갖고 살아가기엔 인식도 시스템도 열악하기 짝이 없는 이 사회에서 견뎌낼 수는 있을까”. 온갖 상념들로 몸도 마음도 힘들었지만, 누군가에겐 숨쉬는 일과 다름없는 일상이 누군가에겐 숨통이 조이는 듯한 일상일 수 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한 시간이었다.

공감과 이해에 경험을 넘어서는 것이 없다. 최근 엄마의 몇 차례 암수술로 병원생활을 하며 간병의 고충도 깊이 이해하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나보다는 수술 경험이 있는 이모와의 대화가 편하다 하신다. 말로 표현 못할 통증을 말을 하지 않아도 이해하는 것이 느껴진다는 이유다. 책을 출간해 본 경험도 그랬다. 세상에 널린 게 책이고 작가지만, 막상 겪어보니 책에 대한 비평 이전에 수고하셨다는 말이 진심으로 우러나온다. 출간 이력보다는 “개나 소나 글을 쓴다”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게 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지식이 쌓일수록 무지와 맞닿는 면적도 넓어지며 스스로의 협소함을 자각하게 되듯, 시야가 넓어질수록 내 경험치와 인식의 한계도 절감하게 된다. 엄마는 자식들을 낳자마자 손·발가락이 다섯개인 것, 신체가 건강한 것만으로 안도감을 느꼈다고 하신다. 다수에 속하는 신체 형태를 가진 것, 보조도구나 타인에 기대지 않고 보고 듣고 말하고 걸을 수 있는 것, 호흡기 없이 숨을 쉬고 타고난 신체기관을 통해 배설할 수 있는 것. 이 모든 것이 우연히 주어진 행운일 뿐임을 깨닫는 순간, 반대로 우연히 불운을 겪게 된 장애인들의 삶과 이토록 차이가 나는 것이 공정한 것인가에 대해 의문도 든다.

유독 공정을 부르짖는 정치인이 장애인들의 이동권 투쟁 중 비이성적인 행동을 비난하는 모습을 접했다. 오래전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직업군인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하셨던 아버지와 논쟁하다 “그 전쟁에 개입한 건 미국조차 후회하는 어리석은 일”이라는 말을 내뱉은 순간, 수치와 당황스러움으로 경직된 아버지의 표정을 발견했다. 목숨 걸고 국가와 가족을 위해 일한 가장으로 인정받고 싶으셨을 마음. 가족에겐 말 못했을 전쟁 트라우마를 먼저 헤아리지 못하고, 시비지심에만 도취된 내 모습에 부끄러움과 죄송함이 밀려오며 눈물이 터졌던 기억. 사람이 없고 옳고 그름만 있는 대화는, 삶의 경험은 일천한데 논리에만 밝은 오만한 이들이 흔히 범하는 오류다. 때로 말을 아끼고 삼키는 이들이 자신보다 판단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 반대여서일 수도 있음을 깨우칠 만큼 성숙지 못한.

“타인의 처지와 고통을 헤아릴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은 말하기의 무능과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 한나 아렌트의 말이다. 사유의 무능은 경험의 빈곤에서 온다. 경험만이 지혜를 주는 것은 아니지만, 삶의 범주가 편협하면 그조차 얻을 기회가 없다. 소외된 약자의 경험이 결핍된 자신감 넘치는 행운아들만 선망하고 숭상하는 사회와 정치가 사람이 없는 말장난의 난장일 수밖에 없는 이유일 것이다. 무능할수록 유능해 보이는 아이러니. 진정한 공정은 ‘그들만의 시험 성적 리그’가 아니라, 우연한 행운과 불운이 만든 편향된 출발선과 누림의 격차들을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임을 모르는 이들일수록 그렇다.

박선화 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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