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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망함으로 다가왔던 박원순 서울시장의 사망 소식은 성추행 혐의 내용이 드러날수록 인권변호사의 위선과 이중인격을 목도하는 것 같아 당혹스럽다. 권력형 성범죄 의혹에 대한 여권 인사들의 ‘내로남불’식 태도, 진영 논리가 뒤섞인 정치 공방까지 가열되면서 곳곳에서 정신분열을 호소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박 시장의 공을 평가하며 추모를 강조하는 쪽과 피해자의 호소에 반응하며 그의 죽음을 비판하는 쪽으로 갈라진 사회. 서울광장에 마련된 박 시장 분향소, 당·정·청 주요 인사들의 조문 행렬, 박 시장의 업적을 되새기는 말들을 보고 듣는 내내 불편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

혹자는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구분해서 보자고 한다. 그게 가능할까. 사회적 약자와 민주화운동을 대변해온 인권변호사로서의 삶이 커다란 족적을 남기고 한국 사회의 진보에 밑거름이 됐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이유로 박 시장의 공과를 구분하고 추모와 진상규명을 이원화하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성범죄 관련 지원활동을 해온 전문가들은 피해 여성의 진술에 신빙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성추행 혐의가 사실이라면 박 시장이 평생 일궈온 삶 자체가 부정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100% 완벽한 도덕성을 요구하는 게 아니다. 인권운동에 헌신하고, 직장 내 성희롱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하고, 약자 보호를 외친 사람이었던 만큼 최소한 그 부분에서는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 했다. 박 시장을 고소한 피해자는 “그분(박 시장)을 향해 이러지 말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힘들다고 울부짖고 싶었다. 거대한 권력 앞에서, 공정하고 평등한 법의 보호를 받고 싶었다”고 했다. 박 시장이 4년 동안 한 사람의 삶을 파괴한 것은 30년간 자신이 쌓아온 업적을 모조리 무너뜨리고도 남을 중대 사건이다. 시민사회를 위해 헌신한 그의 삶은 이미 ‘3선 서울시장’ 타이틀로 평가받았다. CCTV에 포착된 그의 마지막 모습에선 두 얼굴로 살아온 권력자의 모습만 아른거린다.

집권세력은 추모에 집중하며, 피해를 호소하는 한 개인을 사실상 외면했다. 청와대와 더불어민주당, 여성가족부 등은 ‘피해호소인’이라는 표현을 썼다. 서울시가 15일 발표한 입장에는 성추행도, 피해자도 없었다. 집권여당 인사들은 박 시장 성추행 의혹 제기를 “사자명예훼손에도 해당할 수 있다”고 겁박하고, 정의당 초선의원들이 박 시장 조문을 거부하는 것을 “정치력 부재” “경험 부족”이라 폄하했다. 뒤늦게 여당 대표와 소속 의원들의 사과 표명이 이어졌지만 진정성이 느껴지기보다는 마지못해 하는 요식 행위로 비친다. 피해자에 대한 신상털기와 비방 등 2차 가해가 심각하고 박 시장의 죽음을 둘러싼 각종 음모론이 무성함에도, 정작 ‘미투’ 운동을 촉발시켰던 사람들이 입을 닫고 있는 것 또한 이해하기 어렵다.

“누군가 자신이 진실을 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개소리를 지어내는 데는 그러한 신념이 필요 없다. 그는 진리의 편도 아니고 거짓의 편도 아니다. 그저 자기 목적에 맞도록 그 소재들을 선택하거나 가공해낼 뿐이다.”(해리 G 프랭크퍼트 <개소리에 대하여> 중에서)

<이주영 정치부 young78@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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