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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차원에서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눌 때 그 답의 하나는 군자와 소인이다. 흔히 군자와 소인은 도덕 차원에서의 분류법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이다. 정치의 근간은 언제나 도덕이었기에 군자와 소인의 구분은 줄곧 정치에 적용되어 왔다. 그런데 세 부류로 나눈다면?
공자는 군자와 더불어 일을 도모할 수 없다면 차선으로 ‘광견지사’와 함께하리라고 단언했다. 광견지사는 ‘광(狂)’한 이와 ‘견()’한 이를 가리킨다. 광한 이는 품은 뜻이 크고 기개가 드높지만 행동이 이를 따르지 못하는 유형이고, 견한 이는 한번 어떤 뜻을 품으면 이를 고집스럽게 추구하는 유형이다.
장점보다는 단점이 클 수 있지만 공자는 이들이 지닌 장점에 주목했다. 바로 큰 뜻과 기개, 고집 덕분에 이들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정도를 걷게 된다는 점이다. 결국 공자는 사람을 ‘군자-광견지사-소인’으로 나눈 셈이다. 그리고 “너희는 군자 유생이 되어야지 소인 유생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공자의 당부에서 보이듯 이는 식자층, 곧 치자(治者)를 대상으로 한 구분이었다. 여기에 공자는 비유컨대 생태계 교란종과 같은 유형을 하나 더 들었다. ‘향원(鄕愿)’이 그것이다.
공자는 향원에 대해 “덕을 해치는 자”라고 잘라 말했다. 왜 그런지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 그러니 후학들이 궁금해함은 당연했다. 맹자의 제자도 그러했다. 하루는 한 제자가 그 까닭을 여쭈었다. 맹자는 늘 그렇듯 청산유수로 답했다. 그 요지는 향원은 충실한 듯, 청렴한 듯하기에 군자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사이비’라는 것이다. 그냥 사이비가 아니라 진짜에게 해를 입히는 악성 소인배란다. 언뜻 보면 삼갈 줄 알고 행실이 도타워서 누구에게나 좋은 평판을 듣는다. 하지만 이는 본색을 감춘 채 그러한 척한 것에 불과하니, 한마디로 “삿된 욕망을 숨기고 세상에 아첨하는 자”라는 것이다.
공자와 맹자 모두 그 정체를 신랄하게 헤집었음이다. 그럼에도 인류의 역사는 아무래도 향원의 세상이었던 듯싶다. 맹자 이후로도 향원에 대한 경고가 끊이지 않았지만 경고했던 이들이 결국은 뜻을 펴지 못했음이 그 증거이다. 바야흐로 향원이 활개 치는 시절이 다가오고 있다.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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