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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현대 지성사는 사회학자로서 나의 오랜 관심사였다. 신문에서도 그동안 두 번 다뤘다. 하나는 2013~2014년 경향신문에서 ‘우리 시대 사상의 풍경’이란 제목으로 우리 현대 사상가 24명을 탐구한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2018~2019년 한국일보에서 ‘100년에서 100년으로’라는 제목으로 역시 우리 현대 사상가 60명을 조명한 것이었다.
우리 현대사상은 서구 현대사상으로부터 작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동시에 서구 사상을 우리 역사와 사회의 맥락에서 재구성함으로써 한국적 사상을 일군 이들도 적지 않았다. 앞서 말한 두 기획에서 모두 다뤘던 이들은 그런 지식인들이었다. 강만길, 리영희, 이어령, 김우창, 백낙청, 이효재, 최장집, 박세일, 그리고 김종철이 바로 그들이었다.
김종철 선생이 6월25일 세상을 떠났다. 여기서 내가 선생을 기억하고 추모하려는 까닭은 두 가지다. 첫째, 선생은 서구 생태학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탐구한 지식인이었다. 선생에게 크게 영향을 미친 사상은 아르네 네스 등의 심층생태학이다. 심층생태학은 생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 인류의 사유 방식이 근본적으로 전환돼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 지구에서 자연과 인간은 하나의 생물권을 이루는 동등한 존재라는 메시지다.
선생이 심층생태학에 가깝다고 해서 정치생태학을 경시한 것은 아니었다. 오늘날 자본주의가 기존 생산과 소비 체제를 바꾸지 않으면 이 지구는 지속 불가능하다. 이 지속 불가능성을 극복하기 위해선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에 대한 의식과 제도를 혁신해야 한다. 선생은 “인간이 지구라는 행성에 살아남으려면 지금 절실한 것은 장기적인 비전과 공생의 윤리”라고 절박하게 주장했다.
둘째, 선생은 무위당 장일순의 생태사상을 계승해 한국적 생태사상을 일궜다. 장일순은 우리 현대사에서 환경과 생명의 의미를 선구적으로 일깨워준 사상가였다. 선생이 주도한 ‘녹색평론’은 장일순의 글들을 모아 <나락 한 알 속의 우주>를 출간했다. 생명이 먼저고, 자연이 먼저고, 사람이 먼저라는 장일순의 생명사상에 선생은 서구 생태학을 접목해 한국적 생태사상을 발전시켰다.
자신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녹색평론’(1991)의 창간호에서 선생은 말한다. “우리와 우리의 자식들이 살아남고, 살아남을 뿐만 아니라 진실로 사람다운 삶을 누릴 수 있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협동적인 공동체를 만들고, 상부상조의 사회관계를 회복하고, (…) 생태학적으로 건강한 생활을 조직하는 일밖에 다른 선택이 없다.” 우리 역사와 사회 속에서 자연과 인간, ‘나’와 ‘우리’의 공존 및 공생을 추구하는 생태학적 계몽은 선생이 개척한 한국적 생태사상이었다.
오늘날 우리 삶의 터전인 이 지구는 일대 위기에 처해 있다. 기후 위기는 물론 반복적인 전염병의 발생은 그 단적인 증거들이다. 당장 올해 우리 인류에게 시련을 안겨주는 코로나19는 자연 파괴의 진행 과정에서 인간과 동물의 접촉이 증가해 발생한 인수공통감염병이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것은 이제 자유로운 선택이 아닌 생존적인 필수라는 사실을 인류는 지금 깨달아가고 있다.
김종철 선생의 생태사상이 갖는 의의는 바로 여기에 있다. 2016년에 내놓은 <발언 1>에서 선생은 말한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박한 과제는 (…) 자연과 사회적 약자를 끊임없이 파괴하고 희생시키지 않고는 한순간도 지탱할 수 없는 이 비인간적인 시스템을 어떻게 벗어날 것이며, 그리하여 조금이라도 더 인간적이고 지속 가능한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선생은 덧붙인다. “이 암울한 시대를 비통한 심정으로 견뎌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정신적 교감의 공동체일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면, 자연과 인간, 나와 우리의 공존 및 공생을 모색하고 추구하는 이 ‘정신적 교감의 공동체’야말로 선생이 우리에게 선사한, 우리가 일궈 나가야 할 한국적 생태사상의 요체일 것이다.
2018년 8월, 한국일보 기획에서 선생의 한국적 생태사상에 대해 쓴 글이 나왔을 때, 그 글을 선생님께 보내드렸다. 선생님이 답장을 주셨다. “제게 사상이랄 게 있습니까. 면구스럽네요.” 선생님은 이렇게 겸손한 분이셨다. 한국적 생태사상은 장일순에서 시작해 김종철이 확고한 기반을 마련했다. 선생은 세계적·한국적 차원을 두루 고려한, 이 땅에서 찾기 드문 진정한 사상가였다. 나를 포함한 후학들이 선생의 사상을 이어가야 할 책무를 다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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