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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를 하려고 메카로 모여든 무슬림들을 위해 텐트 수십만 채가 설치된다고, 그곳에서 어린 시절 부모님을 찾아 비슷비슷한 수많은 텐트 사이를 헤맸던 기억이 있다고 말한 건 그였다. 지금은 세계 최대 난민촌이 형성된 슬픈 콕스바자르의 모래사장이 얼마나 길고 아름다운지 알려준 것도 그였다. 한국의 인스턴트 라면과 달콤한 커피믹스가 아직도 생각난다고 한 것도 그였다.

나의 친구인 그는 방글라데시인이다. 여성이자 무슬림이고 국제 NGO에서 일한 지 10년이 훌쩍 넘은 베테랑 활동가다. 수많은 이질적인 정체성이 교차하는 그의 존재는 세상을 보는 시야를 넓혀주는 든든한 보물창고 같다. 지금도 현장을 누비고 있을 그의 소식을 주로 SNS를 통해서 알게 되는데, 최근 그가 포스팅 여러 개를 올렸다. 방글라데시에서 벌어진 성폭행 범죄에 대한 것이었다. 노아칼리 지역에서 한 여성이 여러 명의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했고, 이 장면을 촬영한 영상이 온라인에 퍼진 것이다. 범인들은 피해자에게 촬영 사실을 알리며 돈까지 요구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사건 이후 범인들에게 응당한 처분을 하라는 주장을 담은 시위가 들불처럼 번졌다.

이번 사건은 분노를 폭발시킨 하나의 촉매제였을 뿐, 방글라데시 안에서 여성을 향한 폭력과 학대, 차별은 일상과도 같았다. 그가 한 번은 이틀간의 방글라데시 뉴스를 훑어보았더니 ‘3일 전 10세 아이를 강간한 범인 붙잡혀’ ‘결혼하자고 약속하며 여성 성폭행한 1명 구금’ ‘학생 한 명 집단성폭행한 3명 붙잡혀’ ‘주부 집단성폭행한 범인 중 한 명 붙잡혀’ 등 여성 인권 유린 상황에 대한 기사가 쏟아졌다고 한다. 끔찍한 헤드라인을 모아놓고 ‘이게 우리의 현실’이라고 말하는 친구의 포스팅에 뭐라 댓글 한 줄 달지 못하고 말았다.

그는 말했다. “사건이 신고되고 범인들이 붙잡히고, 유죄를 인정받고 형량이 결정된다. 이러한 일련의 절차가 없다면 피해 생존자들은 ‘지옥’을 경험하게 된다. 피해자들은 ‘너는 여자야, 그래서 이런 이런 것들을 했고, 그게 바로 네가 폭행을 당한 이유야’라고 말하는 헛소리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일단 시민들의 요구에 단독으로 범행을 저지른 경우 법정 최고 형량이 사형으로 높아졌고, 지방 법원 지원에서 집단성폭행범에 대한 사형선고가 내려지기도 했다. 하지만 사회 구조와 인식의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기에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해 보인다.

사실 이 소식은 국내 언론에선 잘 전해지지 않았다. 미국 대통령 선거나 유럽에서 발생한 테러처럼 사건의 장소가 소위 선진국이 아니고, 관계자도 유명하거나 힘이 있는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여성이 살고 있다. 여성의 삶이 있다. 국경, 나이, 언어, 종교를 초월해 평범한 여성들의 살고 싶다는 절규, 폭력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외침, 동등한 권리를 보장해 달라는 요구. 낯설지 않은 이 이야기들은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대낮에 성폭행 사건이 일어날 확률이 다른 나라보다 낮을지는 몰라도 강남역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텔레그램 n번방을 통해 성착취물이 제작·유포되는 현실을 우리는 살고 있다. “너의 삶, 그리고 우리의 삶을 응원한다”는 말을 그에게 꼭 전하고 싶다.

이지선 뉴콘텐츠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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