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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난 칼럼에서 비정규직법이 아무도 노동자에게 도덕적 책임을 지지 않도록 만들기에 노예제보다 더 악하다고 비판했다. 왜 그런가? 지속 가능한 사회적 삶을 허물기 때문이다. 사회적 삶은 두 명 이상의 사람들이 특정한 시공간에 모여 상호작용하면서 싹튼다. 이 사회적 삶이 ‘지금 여기’에 갇혀 사그라지지 않으려면 사람들이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 도덕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이러한 도덕은 내면으로 결속한 사람들 사이에서만 가능하다. 도덕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 강제’이기에 사람들이 아무리 뿔뿔이 흩어져 있다 해도 지속한다.
도대체 사람들이 모여 무슨 일을 하기에 내면으로 결속하는 것일까? 사회학자 게오르크 지멜은 선물의 무조건적 증여와 이에 대한 무한한 감사에서 실마리를 찾는다. 선물의 무조건적 증여는 내면의 세계를 일깨우는 행위이다. 사람은 가치 있는 것을 얻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그 희생을 통해 얻은 것을 사랑한다. 주는 사람은 그렇게 힘겹게 획득한 소유물을 상대방에게 거저 주려니 내면이 흔들린다. 받는 사람도 그 선물이 어떤 희생을 통해 획득한 것인지 잘 알기에 떨리는 경외감 속에서 받는다. 이렇게 내면이 일깨워진 사람들은 도덕으로 묶인다. 이는 단지 상품을 교환하는 순간 잠시 묶였다가 풀리는 매매관계와는 분명 다르다.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 그 도덕적 관계에 계속 헌신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장기적 헌신을 통해 사회적 삶은 불멸한다.
현재 저출산과 고령화로 한국 사회가 인구 재생산의 위기에 빠졌다는 탄식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이를 해결하자고 온갖 근시안적인 출산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한국 사회가 처한 불멸성의 위기를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다. 선물과 감사의 고리가 끊겼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현대사를 통해 선배 세대가 그렇게나 힘들게 획득한 소유물을 후속 세대에게 선물로 거저 주지 않는다. 가치(자유롭고 민주적인 독립된 나라)를 획득하기 위해 선배 세대가 치른 희생이 후속 세대의 내면을 깨우지 못한다. 후속 세대는 일상에서 자유롭고 민주적인 삶을 체험하지 못하기에 자신이 온전한 국민이 아니라고 탄식한다. 가슴속에 감사 대신 원한만 가득하다.
이러한 원한 감정에 불을 지른 것이 비정규직법이다. 비정규직법은 단지 직업의 안정성을 허무는 데 그치지 않는다. 노동자에게 자신이 사랑하지 않는 일에 헌신하도록 강제하는 게 진짜 문제다. 현재 젊은이는 노동시장 진입부터 파견직 등 비정규직에서 출발하기에 자기 일을 사랑하려야 할 수 없다. 사랑하지도 않는 일에 인간 한계를 부정하는 극한 노동으로 헌신하려니 소명 의식이 생길 리 없다. 소명 의식이 없는 노예가 많아지는 사회에서는 가치 혁신이 일어날 수 없다. 막스 베버는 세계에 대해 자기 고유의 입장을 정립하고 이를 통해 그 세계에 주관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문화 인간이 가치를 혁신할 수 있다고 말한다. 영혼을 지닌 인간만이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영혼을 지닌 인간은 현실과 가치의 세계를 넘나드는 반면, 사물화된 인간은 주어진 현실 안에 갇혀 있다. 사물화된 인간의 극단인 노예는 헌신, 사랑과 같은 가치론적 용어를 알지 못한다. 사회로부터 단절된 채 비인간적인 고된 노동에 시달리다 점점 소멸해간다.
오늘도 비정규직법은 청년을 원한 감정에 내몰고 있다. 선배 세대가 헌신한 가치를 부정하고 조롱할 뿐만 아니라 상대방을 벌레로 몰며 모욕하도록 부추긴다. 끝내 선물과 감사의 도덕적 관계를 무너뜨려 한국 사회의 불멸을 위협한다. 더 늦기 전에 경제적 효율성의 좁은 눈가리개를 벗어 던지고, 가치 혁신을 통해 공동체가 불멸한다는 사회학의 통찰을 따라야 한다. 비정규직법을 과감하게 전면 철폐하고 청년에게 가치 있는 선물을 선제적으로 증여해서 그의 내면에 감사를 일깨워야 한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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