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호흡곤란 증상을 보였다. 병원은 신생아 집중 치료를 위한 장비가 없다며 두 시간 거리의 대학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밤길을 달려가 닿은 병원은 미리 확인도 없이 찾아왔느냐며 입원을 거부했다. 또 다른 병원을 찾아갔지만 자리가 없었다. 두 번째 병원으로 돌아가 다시 문을 두드렸지만 확인서가 필요하다며 돌려보냈다. 자리가 없다는 확인을 받으러 세 번째 병원을 갔지만 못 믿겠으면 직접 확인하라는 말만 했다. 그사이 아기의 심장은 멎었다. 태어나 하루도 채우지 못하고, 구급차 안에서. 2005년 터키에서 있었던 사건이다.

안됐다,고 우리는 느낄 것이다. 의사가 진료를 거부하지 않았더라면, 병원의 치료 장비가 고장 나지 않았더라면, 아기는 살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데 유럽인권재판소는 조금 다르게 말했다. 국가가 안 했다! 아기는 의료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응급의료 접근이 박탈된 피해자이며, 국가는 생명권 보호 의무를 위반했다(아시예 겐츠 v. 터키, 2015). 불운이 아니라 인권침해다.

지난해 3월 코로나19 감염이 확산되고 그보다 더 빠르게 불안이 번질 때, 열일곱 살 소년 정유엽은 감기 기운을 느꼈다. 정부가 “막연한 불안감으로 검사를 받을 필요는 없다”고 홍보하던 때다. 소년의 부모는 아들에게 해열제를 먹이며 이틀을 집에서 기다렸다. 열은 떨어지지 않았고 소년의 상태는 악화되었다. 부모는 아들을 데리고 ‘국민안심병원’을 찾았다. 병원에 간 날은 선별진료소가 문을 닫아서, 다음날은 검사를 했지만 결과가 확인되지 않아서, 소년은 입원할 수 없었다. “엄마, 나 너무 아프다.” 3차 병원 음압병실로 입원하기 전 부모가 들은 마지막 말이다. 앞선 검사 결과가 음성으로 확인됐지만 병원은 양성 판정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듯 검사를 반복했다. 열세 번째 검사 결과가 양성이었다. 병원 주차장 자가용에서 엿새를 지낸 부모는 자가격리 통보를 받고 그곳마저 떠나야 했다. 두 시간 후 아들이 숨을 거뒀다는 연락을 받을 줄도 모르고.

모든 사람에게 생명권이 있다고 말하기는 쉽다. 하지만 생명을 권리로 감각하기는 쉽지 않다. 인권활동가인 내게도 마찬가지인지라 나는, 국가가 할 수 있는 걸 더 찾아내라는 요구라고 머릿속에 새긴다. 국가는 죽음에 응답해야 한다.

정유엽이 사망한 다음날 대한민국 정부는 ‘소년의 사망과 코로나19는 연관성이 없다’고 밝혔다. 그걸로 끝이었다. 코로나19냐, 아니냐만 따지는 동안 응급의료 접근이 가로막혀 죽어간 사건은 딱히 조사할 일도 못됐다. 다시 없으면 좋을 일이지만 다시 없게 애쓸 일은 아닌가 보다. 코로나19 백신과 사망에 인과관계가 없음을 알리기만 바쁜 정부의 모습에서도 그 내력이 보인다. 마음만 다스리면 ‘국민안심’이 되는 건지, 안심할 조건은 만들지 않는다. 열이 나면 우리의 처지는 정유엽과 얼마나 다른가. 열의 원인이 코로나19든 백신이든 또 다른 질병이든 응급의료가 필요한 상황에 혼자 버려지지 않도록 하겠다는 약속은 아무도 듣지 못했다. 권리는 시작되지 못했다.

코로나19 이후 여기저기서 ‘의료 공백’이 드러났다. 제대로 작동하던 의료시스템에 갑자기 구멍이 난 것일 뿐일까? 아니다. 권리의 공백이다. 권리에서 출발하는 의료시스템이 없는, 공백이다. 코로나19 감염으로 사망한 사람은 숫자로만 집계되고, 코로나19 대응에 의료 자원을 동원하느라 버려진 사람은 숫자로도 집계되지 않는다. 공공병상을 확충하고 지방의료원을 증축하겠다는 정부의 계획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지금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국가가 ‘나중에’ 죽음을 막게 될 리 없다.

유럽인권재판소는 그래서 이런 판결을 덧붙였다. 국가가 충분히 조사하지 않은 것도 생명권 보호의무 위반이라고. 정유엽의 아버지가 진상조사와 재발방지를 요구하며 걷고 있다.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일반 칼럼 > 세상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튤립 광풍과 부동산 광풍  (0) 2021.03.22
질투는 힘이 없다  (0) 2021.03.19
탄소금식과 생태적 회심  (0) 2021.03.15
노동의 ‘가치 혁신’  (0) 2021.03.12
진정 미국이 ‘제대로’ 돌아왔기를  (0) 2021.03.09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5/06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