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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변두리 공중목욕탕
어스름
한가운데
플라스틱 바가지를 베고
바닥에 모로 드러누운
누에 한 마리
굽은 마디들
듬성한 백발
노역에 닳은 몸은
자루 같은 가죽만 남아
마지막 뽕잎을 갉아 먹고
영원히 잠들었네
환기통으로 날아오르는
새하얀 나방
김선향(1966~)
누에는 살면서 네 번의 잠을 잔다. 누에가 뽕잎을 갉아 먹는 소리는 숲속에 내리는 빗소리 같다. 귀를 적신 소리는 온몸을 소리로 물들인다. 마지막 잠을 자면 몸의 색이 변하고, 입에서 실을 뽑아 고치를 만든다. 골무 같은 고치 속에서 번데기가 됐다가 누에나방으로 우화(羽化)한다. 하지만 나방이 되기 전에 고치를 열어 번데기를 꺼낸다. 번데기는 먹거리로 팔리고, 명주실로 풀린 고치는 비단옷이 된다. 누에는 아낌없이 다 준다. 아니 빼앗긴다.
“변두리 공중목욕탕”까지 내몰린 노인이 번데기처럼 누워 있다. 깨끗이 몸을 씻고 “모로 드러누워” “영원히 잠”들었다. 노인은 평생 노역에 시달렸지만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 “가죽만 남”은 몸,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외로운 죽음이다. 연고도 없는 노인에게서 누가 먹을 것과 입을 것, 잠잘 곳을 빼앗았는가. 죽는 순간까지 꿀을 빨아 먹고 방기(放棄)했는가. 새벽 어스름, 노인의 영혼이 “환기통으로 날아오”른다. 그리운 엄마 곁으로 돌아가고 있다.
김정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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