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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 내가 한국에서 왔다는 걸 알면 으레 처음 하는 질문은 정해져 있었다. 약간 경계하는 얼굴로 “노스 오어 사우스(North or South)?” 그리고 남한이라고 답하면 좀 안심한다. 한국전 배경의 최고 시청률 드라마 <매시>는 11년의 방영 뒤에도 끝없이 재방영되며 미국인들에게 나쁜 한국 이미지를 만드는 데 큰 몫을 했다. 한국전과 북한, 보신탕으로 대변되는 한국의 이미지는 잘 변하지도, 남을 알려고도 하지 않는 미국인 특성상 꽤나 오래갔다. 교포 2세, 3세들은 한국과 거리를 두려 했다.

지금은 다르다. 작년 초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 시상식은 로컬”이라는 도발적인 말과 함께 4개 부문상을 휩쓸었다. 수상소감도 멋졌다. 다음날 독서클럽에 가니 온갖 나라 사람들이 나를 축하해줬고 결국 초콜릿을 한 상자 가져가 나눴다. BTS는 또 어떤가. 빌보드 5주 연속 1위에 오른 이 그룹은 재미한인들의 은인이자 대한민국 문화대사다.

나이 차이가 꽤 나는 아이 둘을 키우는 친구는 첫째와 지금 둘째를 키울 때의 분위기가 너무 다르단다. 첫째 때는 학교에서 ‘중국인이니 일본인이니’ 물었다면 이제는 ‘한국인이니?’가 붙는다. 한국인인 걸 알면 친해지고 싶어 하고 자기 아이도 모르는 K팝 가수와 그들이 먹는 음식, 하는 행동 등을 다 궁금해한다고 한다. 예전에 자신이 뜻도 모르는 팝송 가사를 한글로 적으며 외웠던 것처럼 뜻 모르는 한국어 가사를 알파벳으로 적고 외우며 자꾸 물어봐, 자기 아이도 코리안임을 자랑스러워하며 한국과 한국어를 열심히 배우고 있단다. 최근 뉴욕대 병원에 갔더니 나이 지긋한 의사가 ‘그 맛있는 파전’ 먹을 곳을 물어 결국 한국 음식점을 적어주고야 진료를 시작할 수 있었다. 또 미국에 산 지 30년이 넘은 친구는 자신이 한국인인 걸 안 사람이 “아이 러브 코리안”이라 했다며 “이런 일은 처음”이라 했다.

한국 영화나 드라마에서 현실의 혼란스러운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자유롭게 비판하는 것은 촛불과 투쟁으로 만들어낸 민주주의에 대한 자신감이다. 2017년 스페인 여행에서 만난 현지인이 한국인이라고 하니 “너희 평화적 시위로 탄핵시켰다며? 너무 멋있고 부럽다” 말해 놀라며 자랑스러웠던 것이 기억난다. 뉴욕타임스 등이 아시아 본부를 서울로 옮긴다는 소식도 이를 반영한다. 거기에 그간의 역사나 이미지로 ‘막연히’ 선진국으로 여겨지던 나라들이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똑같은 시험을 보면서 진짜 실력과 그 민낯이 드러났다. US뉴스의 연례조사에서도 한국의 문화 영향력은 작년 20위에서 올해 7위로 껑충 올랐고 코로나 성적을 반영해 미래지향적 나라 1위에 선정됐다.

요즘 한국인으로 미국살기가 신이 난다. 문화, 경제, 정치 이 모든 것에서 대한민국은 세종대왕도 김구 선생도 바라시던 나와 남을 다 행복하게 하는 문화강국의 길에 이미 올라 있다. 물론 멀리 밖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막상 안에 있으면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 일들이 많을 것이고, 그럼에도 이렇게 잘하려면 가뜩이나 부지런하고 똑똑한 우리 한국인들이 얼마나 애쓰고 있을까 싶다. 그저 덕분이라 여기며 멀리서 응원할 뿐. 대한민국의 모든 분들께 두 손 모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꾸벅.


이채린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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