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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문화와 삶

손이 있는 곳

opinionX 2021. 7. 8. 09:50

드라마 <미치지 않고 서야>를 보다가 한 장면에 묘한 공감을 느꼈다. 이제 막 지방 사업부 하나를 정리하고 온 ‘한영전자’ 인사팀 에이스 자영(문소리)은 늦은 밤 집에서 룸메이트와 이야기를 나누다 갑자기 집을 나선다. 자영이 가는 곳은 주차장에 주차된 본인의 차 안. 운전석에 앉아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던 그는 전화가 걸려오자 눈을 질끈 감고 스스로에게 기합을 넣는다. 전화기 건너편엔 자영의 상사가 있고 그가 자영에게 또 한 번의 대규모 해고 업무를 맡겼다는 사실과 그 대가로 자영에게 주어진 것이 승진의 기회라는 것을 알고 나면 늦은 밤 그가 뱉은 고된 숨의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누구를 해고할 지위도 아니고, 그런 업무의 근처에도 가본 적 없으며 오히려 그런 ‘인사권’이란 것에 뭉뚱그려진 적개심만 가득한 내가 그 장면에 마음을 투영한 이유는 자영이 전화를 받기 위해 집을 나와 차를 타는 순간에 있다. 차를 타고 문을 닫으면 순간 꽉 하고 맞물리는 탁한 소리와 함께 외부소음이 일시적으로 차단된다. 강제로 화면 전환을 경험한 것처럼 옅고 짧은 이명이 들리다 몇 초 뒤 고요함에 익숙해지면 비로소 나만의 공간에 있게 되었다는 안정감에 사로잡힌다. 나는 그 안정감을 무기로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초조한 구걸을 하고, 급한 용건을 처리한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도 핸들을 받침 삼았으니 나의 온전함은 이곳에 고립되어 있을 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든다.

퇴근 무렵 성수대교 진입로에 갇혀 생각했다. 차가 없던 때의 나는 대체 어디에 있었을까? 자동차라는 도피처에 너무 많은 것을 의존하게 된 나는 꼭 남을 생각하듯 과거를 더듬는다. 침을 삼키고 숨을 참으며 불안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를 썼던 때를. 언제나 아지트를 찾고 있었다. 비밀스러운 곳이 아니어도 괜찮았다. 네 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가야 하는 곳이거나, 오르막과 계단을 한참 올라야 갈 수 있는 곳, 도심 한복판의 가장 시끄러운 상가 앞, 오늘은 버드나무였다가 내일은 갈대숲이 되는 강가의 불특정한 곳이라도. 도망갈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았다.

나의 불안과 절실함을 알아봐 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불안을 다스리라며 언제든 자신의 공간을 내주었다. 아지트를 찾기 위해 배회를 거듭하다 벼랑 끝에 내몰린 나는 염치없이 그 공간에 발을 들였다. 대개 그들은 나를 ‘여성’이라 했고, ‘청소년’이라 규정했는데 그것은 낙인이 아니라 그늘이었다. 그 그늘은 내가 굴욕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곳이었다. 나는 주인처럼 그곳을 누볐다. 낡은 마루를, 오래된 스탠드를, 마모된 계단을, 비좁은 다락방을. 그곳엔 언제나 주눅들지 않은 내 목소리가 있었고, 내 이야기를 편견없이 들어줄 귀가 있었다.

지난 6월 청소년 페미니스트 단체가 서울 마포의 한 문화공간에서 단체의 성격 때문에 대관을 거절당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배움의 기회를 충분히 받지 못한 설립자의 기탁으로 세워진 충북 제천의 여성 전용 도서관은 ‘성차별’이라는 청원 끝에 이달 말부터 이용 제한이 사라진다. 대학들은 경쟁하듯 총여학생회를 폐지하고, 대선 주자로 이름을 올리는 야당의 유명 정치인은 ‘여성가족부’ 폐지를 핵심 공약이라며 내건다. 이 사안들에 가해지는 공격과 중첩된 논쟁들을 떠올리면 이렇게 간단하게 엮기 힘든 문제처럼 느껴지지만, 내가 느끼는 징후 안에서 이 근거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공간을 늘리는 것보다 공간을 빼앗을 때 그 불안이 해소되는 사람들로부터 그늘을 빼앗기는 징후를. 이에 나는 절망을 느끼고 숨는 대신 시를 읽는다.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으니.’ 이런 문장을 쓰고, 이런 문장 같은 삶을 살고 간 여자의 낙관에 기대면서 이제 내가 기꺼이 그 손이, 그 공간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하며.

복길 자유기고가·<아무튼 예능>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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