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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정부 시대다. 큰 흐름이고, 큰 바람이다. 1970년대 시작된 작은 정부의 흐름은 완전히 꺾였다. 언제, 누가 꺾었을까? 코로나19 팬데믹? 아니다. 팬데믹은 작은 정부론의 실패를 확인시킬 뿐이다.
작은 정부, 최소 정부는 초기 자본주의 시대의 고전적 자유주의의 프레임이다. ‘자유는 불간섭이다’라는 옛 프레임은 공산주의와의 경쟁에서 무기력했고 그 때문에 대공황 이후 폐기되었다. 그런데 정작 공산주의 체계가 실패하면서 자유를 시장 불간섭으로 축소시킨 신자유주의로 부활한다.
40년 동안 유행한 작은 정부, 최소 정부는 시장 권력, 자본 권력에 정치를 아웃소싱한다. 위르겐 하버마스의 진단처럼 이 시기 자본과 시장 권력은 정치만이 아니라 국민의 생활세계조차 내적으로 식민화시킨다. 그런데 국민이 정치와 법을 통해 규제하고 간섭하는 것을 근본악으로 몰아가며 승리를 구가하던 자본과 시장이 2008년 갑자기 스스로를 파괴하고 괴멸할 위기에 처한다.
자본시장이 파괴한 자본주의를 구제한 것은 국가다. 정치 부재의 결과인 금융위기의 고통을 껴안은 시민들을 설득하며 정부가 거대한 공적 자금을 투여한다. 이 과정을 통해 작은 정부에서 큰 정부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위기에 몰렸던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체계가 되살아났다.
정치만이 아니라 시민들도 대전환 이후를 준비하지 못했다. 더구나 자본시장의 논리에 완전히 식민화된 일부 정치세력은 지금도 대전환을 부정한다. 해방 이후에도 의식은 여전히 식민지 상황에 멈춘 사람들이다. 이들은 팬데믹 때문에 큰 정부가 판친다고 고함지른다. 슬라보이 지제크가 최근 저서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에서 말하듯 팬데믹은 전환의 주체가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전환을 좀 더 선명하게 부각시켰을 뿐이다.
성장과 복지의 선순환만이
지속 가능한 국가체계를 만든다
최대 다수가 내고 동시에 혜택받는
‘기본복지-기본조세’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는 대통령은?
생활세계에서 건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 전환을 감지하고 그에 따라 의식을 바꾸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수많은 통계 중에서 매년 나오는 <한눈에 보는 사회>를 계속 추적하는 학자라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먼저 2018년 시행된 설문지에 다음과 같이 직접적 물음이 던져진다. “당신은 정부가 경제 및 사회 보장을 위해 더 적게, 더 많이, 아니면 지금과 같이 일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결과는 놀랍다. OECD 평균에 따르면 정부가 지금보다 역할을 줄여야 한다는 의견은 겨우 6.8%다. 71.4%는 더 많이, 16.8%는 지금처럼, 그리고 7.8%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또 다른 통계에 따르면 OECD 소속 국가의 시민들 다수는 세금에 비추어 혜택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40%의 시민들은 더 나은 연금과 의료 서비스를 위해 세금을 더 낼 의향이 있다고 말한다. 이들 통계에서 우리는 작은 정부에서 큰 정부로의 전환의 정당성만이 아니라 그 방향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큰 정부는 성장과 복지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내야 한다. 지난 40년의 OECD 자료에는 복지가 성장을 방해한다는 증거도 없지만, 역으로 성장이 복지를 보장한다는 통계적 수치도 없다. 반면 복지와 성장의 선순환만이 지속 가능한 국가체계를 만든다는 통계는 차고 넘친다.
복지와 성장의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것은 비교적 단순하다. 세금을 내는 사람과 복지 서비스를 받는 사람의 수를 동시에 늘려야 한다. 가능한 한 최대 다수가 내고 동시에 가능한 한 최대 다수가 받는 기본복지-기본조세 패러다임을 만들어야 한다. 거꾸로 최소의 부자들에게 걷어서 최소의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작은 정부 체계는 대전환에 역행하는 정치 지체를 부추길 뿐이다.
OECD 국가에서 복지의 실질적 최대 수혜자는 중산층이다. 지난 20년의 통계에서 OECD 회원국의 사회복지를 통한 소득이전 평균을 보면 소득 기준 하위 30%가 25~30%, 중위 40%가 55~60%, 상위 30%가 15% 내외의 혜택을 보고 있다. 이처럼 받는 사람이 많은 보편 복지는 중산층을 보다 튼튼하게 만들어서 지속 가능한 성장 퍼포먼스를 연출할 수 있다. 문제는 내는 사람도 많게 하는 합의를 찾는 것이다.
사회적 합의는 사회적 신뢰가 있어야 가능하다. 공정으로서 정의만큼 불특정 타인을 믿고 연대할 수 있는 사회적 신뢰가 커져야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의 사회적 신뢰도는 OECD 최하위다. 증오와 혐오를 어떻게 신뢰와 연대로 바꿀 것인가? 이 문제에 답할 수 있는 큰 정부 대통령을 찾아보자.
박구용 전남대·광주시민자유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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