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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9년 3월 오스카 와일드의 ‘저만 아는 거인’을 주제로 칼럼을 쓴 적이 있다. 자신의 집 정원을 찾아온 아이들을 내쫓은 뒤 여러 해 동안 봄을 잃었던 한 거인의 이야기다.

당시 자유한국당은 황교안 대표 체제를 선택했다. 2월 전당대회에서 5·18 망언과 탄핵 논란이 불거졌고 황 전 대표는 문재인 정부를 좌파독재라고 맹공했다. 전직 대통령 박근혜씨 탄핵, 대선 패배 이후 한국당은 성찰기를 거치는가 싶었다. 하지만 황 전 대표는 ‘저만 아는 거인’을 자처하며 한국당 정원을 봉쇄했다. 2년여가 흐른 뒤, 한국당은 낡은 담장을 허물고 문패도 국민의힘으로 바꿨다.

때마침 이준석이라는 훈풍이 불었고 봄(정권교체) 기운도 무르익었다. 당 주변에선 “제비까지 날아들면 이번엔 봄을 누릴 것”이라는 기대가 커졌다. 대선 패배 후 5년 동안 얼어붙어 있던 정원을 찾아온 제비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과 최재형 전 감사원장이다.

그러나 국민의힘 곳곳에선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제비가 아닐지 모른다며 봄맞이 나서려던 발길마저 주저하고 있다.

국민의힘 대선 주자가 된 윤 전 총장과 최 전 원장이 망언을 쏟아내고 있다. ‘미스터리 스피커’다. 미스터리 스피커는 미국의 대형집회 때 등장하는 깜짝 연사를 가리킨다.

정치는 말의 세계다.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정치가 좋은 정치다. 윤 전 총장은 120시간 노동, 페미니즘 갈라치기, 후쿠시마 원전 논란 발언으로 구설에 올랐다. 최 전 원장은 최저임금 범죄·차등론에다 “국민 삶을 정부가 왜 책임지나”라는 비상식적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가족 애국가’ ‘며느리 해명’ 사건은 가부장적 국가주의를 소환했다.

정치에서 말이 중요한 것은 정치 자체가 복잡한 인간사를 담고 있기 때문에 경험을 통해 일정한 관점을 형성하는 최소한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초보 정치인의 한계가 망언 배경이라는 의미다.

법률 관료 출신이라 그럴 수도 있겠다. 두 사람 모두 출마선언문에서 자유민주주의와 법치를 강조했다. 법의 소임은 정치의 공공성을 강화해 정치의 수준을 높이는 데 있다. 그럼에도 법 제일주의만 강조할 경우 “권위주의 시절과 강권적 질서 유지에 대한 갈망”으로 흐를 수 있다(정태욱, <정치와 법치> 중). 두 사람을 같은 법률가 출신인 이회창 전 국무총리와 같은 위상으로 보는 시선도 있다. 하지만 이 전 총리는 3김 청산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안고 등장했다. 두 사람은 집권세력에 대한 거부감이 만들었다는 이미지가 짙다. 이 전 총리가 대쪽으로 불리며 한국 보수 최상의 후보로 꼽히는 반면 두 사람에게 관료 출신 이력은 그다지 든든한 정치적 자산이 아니다.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두 사람은 전직 꼬리표부터 떼야 한다”고 말한 데는 이유가 있다.

나는 두 사람 망언의 본질이 ‘강자의 무지’라고 생각한다. 남을 위해 웃어본 적 없고, 잘못을 캐내고 심판만 해온 인생. 그러니 주변 이웃의 희로애락을 구체적으로 알 필요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강자의 무지는 평범한 시민들에겐 폭력으로 이어진다.

더 큰 문제는 이들의 망언을 개인 책임으로만 돌릴 수 없다는 점이다. 국민의힘은 스스로 유력 후보를 내지 못하고 장외 주자를 끌어들여 대선을 준비하고 있다. 이들의 입당을 마무리한 뒤 ‘국민의힘=정권교체 둥지’를 선언했다. 그렇다면 망언 속에 드러난 이들의 꿈이 국민의힘이 원하는 정권교체 내용인지, 보수의 진짜 국가 비전인지 묻고 싶다. 양측 지향이 같다면 국민의힘은 ‘반문연대’ 플랫폼일 뿐이다. 다음 대선에 출마하지도 않는 문재인 대통령에 맞서는 것이 제1야당의 목표란 말인가. 윤 전 총장과 최 전 원장 캠프는 박근혜 시즌2, 황교안 시즌2를 보는 듯하다. 이들과 같은 길을 걷겠다면 국민의힘은 보수정치의 퇴행을 용인한다는 뜻인가.

민주화와 산업화는 우리 삶의 흔적이고, 국민의힘으로 대표되는 보수세력은 산업화의 한 축을 자임했다. 박세일 전 의원이 공동체 자유주의를 주장하면서 산업화에 대한 반성은 이뤄졌다. ‘포스트 산업화’를 상징하는 보수의 가치가 무엇인지 아직 모르겠다. 지난 대선 이후 보수의 이념적 리더, 정치적 리더가 부재했던 원인도 이 때문일 것이다.

윤 전 총장과 최 전 원장이 봄을 몰고 오는 제비가 아닐 수도 있다. 달리 말하면 봄이 올 것이라는 확신이 없는 한 제비는 결코 찾아오지 않는다. 아직 겨울을 벗어나지 못했으면서 봄의 전령 노릇부터 하려 든다면 더더욱…. 지금 국민의힘처럼 말이다.

구혜영 정치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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