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일반 칼럼/시선

박원순 생일 편지

opinionX 2020. 12. 28. 09:48

20대 초반, 나는 강간미수 피해를 겪었다. 너무 큰일이라 오히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아마 잊고 싶었던 것 같다. 모른 척한다고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닌 줄 알지만 사건을 공개한다는 건 내 일상을 흔들 각오가 있어야 했기에 당시의 나는 마치 하룻밤 불쾌한 꿈을 꾼 것처럼 그렇게 치부해버렸다. 그렇다고 정말 나쁜 꿈 정도의 피해였냐면 절대로 그렇지 않았다. 힘들고 괴로웠고 종종 떠올랐다.

그는 취기를 핑계 삼아 물리적인 힘을 이용해 나를 성적으로 착취하려 했다. 아는 동생에게 강간을 시도한 나쁜 사람이다. 그러나 동시에 좋은 선배였다. 힘든 일이 있을 때 다독여줬고, 궂은일에 먼저 나서는 사람이었다. 사람 사이의 일로 지쳐 있을 때 허공에 대고 큰 소리로 욕하는 법을 가르쳐주기도 했고 미친 듯이 학교 운동장을 같이 뛰어주기도 했다. 나의 존엄성을 짓밟으려 한 사람이기도 했지만 함께 책을 읽고 사회문제를 고민하게 해준 사람이기도 했다. 인간관계란 이렇게 복잡하다.

저 밑에 묻어두었다고 용서를 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멀쩡히 지하철을 타고 가다, 그 더러운 경험이 생각나면 문자로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그래야 그 불쾌한 기억이 떠오를 때 숨이라도 편히 쉴 수 있었다. 그러다 공식적인 행사를 마치고 서로에게 롤링페이퍼를 쓰게 되면 준비하느라 고생했다고, 덕분에 재밌었다고 좋은 말들을 종이에 남겼다. 손으로 쓴 좋은 말들이 꼭 연서는 아니며, 응원과 지지를 표했다고 과거의 일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내가 한 가지 정체성을 가진 존재가 아니듯, 그 사람과의 관계도 피해·가해의 한 가지가 아니었을 뿐이다.

게다가 나는 대체로 롤링페이퍼에 진심을 다하는 편이다. 주인에게 돌아갔을 때 휑하게 빈자리가 드러나면 왠지 섭섭할 것 같아 이왕이면 예쁘고 잘 나오는 펜을 골라 좋은 말을 잔뜩 써주고, 혹시 그래도 자리가 남으면 이런저런 이모티콘이라도 그려넣으려 노력한다. 별로 할 말이 없는 사이라 할지라도 칸을 비우기보다 다소 추상적이더라도 좋은 응원의 말들을 채우려 노력해왔다. 별로 어렵지는 않았다. 8090에 태어난 많은 여자들이 학창 시절에 친구들과 교환노트를 주고받았고, 자기 키만 한 편지지를 채워 친구의 생일날 선물했다. 그러니 상사나 선배에게 보내는 생일 편지 두 장쯤이야 과거의 내공을 발휘해 얼마든지 쓸 수 있다. 나와 내 주변 사람들에게 롤링페이퍼는 딱 그 정도 위치다. 진심을 담지 않아도 좋은 말을 얼마든지 한가득 쓸 수 있고, 진심이었대도 그 종이가 그 사람과 있던 모든 일을 설명해줄 수는 없다.

최근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생일을 앞두고 만들었던 롤링페이퍼와 편지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라왔다. 모두가 똑같은 종이에 편지를 써서 고리로 한데 묶은 카드모음, 그 뻔한 모양의 생일 축하메시지조차 누군가에게는 특별해 보였나보다. 성추행 피해자라면 직장에서 생일 축하편지 함께 쓰기 따위는 할 수 없다 생각하는 것일까. 피해자 실명까지 공개하며 ‘양측 주장 사이에 모순이 발생해 시민으로서 질문을 던진다’고 하는데 고작 1년에 한 차례 손편지를 썼다는 사실이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는 주장의 모순점이 될 수 있는 것인지 나 역시 시민으로서 질문을 던진다.

김민지 풀뿌리 여성주의 활동가

'일반 칼럼 > 시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언네서세리아트 시대’의 노동  (0) 2021.01.04
연대는 누가 가져갈까  (0) 2021.01.04
이주노동자 속헹의 죽음  (0) 2020.12.28
민주주의 ‘쐐기돌’ 찾기  (0) 2020.12.21
둘 다 좋을 순 없지!  (0) 2020.12.21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5/06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