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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희망을 갖는 게 독이 되기도 한다. 미국과 베트남이 전쟁을 벌일 때의 일이다. 전황은 베트남의 승리로 기울었고 미국은 서둘러 베트남을 떠났다. 많은 미군이 포로로 남았다. 포로들은 석방 협상으로 곧 자신들이 풀려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부활절이 지나고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가 됐지만 진전은 없었다. 희망을 품었던 포로들은 더 큰 좌절에 빠졌다. 그들은 희망에 지쳐 죽어갔다. 미군 장교 제임스 스톡데일은 7년을 버티며 살아남았다. 헛된 희망을 포기하고 냉정한 현실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를 스톡데일 패러독스라고 한다. 되지도 않는 희망을 불어넣은 것은 고문이나 다름없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물리적(사회적) 거리 두기가 지속되고 있다. 지난해 3월 시작해 연장 또 연장이다. 그때마다 ‘이번이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했다. 이번만 버티면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불어넣었다.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규제는 강해졌다. 거리 두기 규제는 일반 직장인에게는 ‘불편함의 감수’에 그치지만 자영업자나 소상공인들에게는 ‘생계의 위협’이다.

자영업자들의 불만이 쌓여갔지만 정부 대책은 제자리를 맴돌 뿐이었다. 정부의 난맥상은 지난 7월에 그대로 드러났다. 정부는 거리 두기 체계를 바꾸면서 “감염 상황에 따른 사회적 거리 두기 단계 조정으로 외국과 달리 전면봉쇄 없이 효과적으로 유행을 차단했다”고 자랑했다. 그러면서 자영업자·소상공인의 규제를 최소화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주 “대유행이 확산되었다”며 거리 두기 단계를 가장 높은 4단계로 올렸다. ‘2주간의 짧고 굵은’ 규제를 말했으나 ‘길고 굵은’ 방역이 지속되고 있다.

“차라리 기대가 없으면 손해가 늘어나기 전에 장사를 접었을 것이다. 그런데 ‘곧 좋아지겠지’ 하는 생각에 가게 문을 닫지 못하고 손실을 감수했다.” 그 결과는 잔뜩 늘어난 빚이다. 월세가 밀리다 보니 보증금으로 충당했고 이도 모자라 집을 담보로 돈을 빌렸다. 처음에는 은행권에서 빌렸으나 한도가 차자 보험이나 증권사, 이어 캐피털이나 사채시장에 손을 벌렸다. 올해 1분기 자영업자의 대출 잔액은 832조원으로 전년 1분기보다 132조원 증가했고 새로 빚을 낸 자영업자도 50만명에 달한다.

모르는 사람들은 ‘장사를 그만두면 될 것 아니냐’고 말한다. 그러나 이미 상당수 자영업자는 폐업할 수준을 넘어섰다. 폐업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폐업을 하게 되면 금융권 부채를 한꺼번에 갚아야 한다. 사업자대출을 받았기 때문에 사업장을 닫으면 채무도 상환해야 한다. 사업장을 인수하면서 냈던 권리금이 사라진다. 그리고 망해서 나가는데 원상복구비마저 내야 한다. 가장 두려운 것은 ‘재기의 불씨’가 꺼진다는 사실이다. 일단 버티면 코로나19 이후에 복구할 기회라도 있는데 사업을 접으면 미래가 송두리째 날아가는 것이다.

정부는 자영업자들에게 지난 7월의 4단계 거리 두기 이후 발생한 손실의 80%까지 보상해주겠다고 발표했다. 자영업자들은 코로나19로 장기간 피해를 입었다. 정부의 대책은 팬데믹에 따른 영업제한으로 인한 피해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미국, 프랑스, 독일, 캐나다, 일본 등은 지난 20개월간 손실보상과 소득보장을 위해 1억~2억원씩 지급했다.

이런 미흡한 손실보상에도 불구하고 재원이 부족하다고 한다. 적어도 2조~3조원이 필요하지만 현재 정부의 재원은 1조원이다. 이 지점에서 지난 9월 전 국민 재난지원금 지급을 소급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는 11조원을 투입해 전 국민의 약 88%에 지급했다. 직접 피해를 본 자영업자나 소상공인들에게 집중 투입돼야 할 돈이 추석을 앞두고 민심 달래기에 쓰였다. 코로나19 피해자들에 대한 ‘넓고 두꺼운 보상’은 말뿐이었다. 혈세가 포퓰리즘으로 신기루처럼 날아갔다. 불 끄는 데 써야 할 소방수가 관상용 잔디밭 뿌리는 데 다 사용된 것이다.

자영업자들은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으로 타격을 입은 데 이어 코로나19로 결정타를 얻어맞았다. 한 감염병 전문가는 “정부가 코로나19 초기 대응 성공에 도취해 정작 중요한 대응에 실패했다”고 말했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코로나19를 이용한다는 말도 나온다. 코로나19로 자영업자 20여명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 희망고문은 좌절로 끝나고 있다. 대책도 분명해 보이지 않는다. 각자도생하라는 것 같다. 국민이 국가에 묻는다. “도대체 당신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박종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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