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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전날 본 한 장면을 잊을 수 없다. 경남 사천에서 한 노동자가 완공을 앞둔 아파트 옥상에 올랐다. 아파트 외벽은 도색을 위해 하얀색으로 밑칠을 마친 상태. 얼마 후면 아파트 브랜드가 적힐 벽 위로 로프에 매달린 남자가 제 몸보다 더 큰 붉은 글씨를 한 자씩 써내려갔다. “시공사 사기꾼, 시행사는 더 사기꾼, 노임 주라.” 추석 전날까지도 임금을 받지 못한 사람, 그에게 남은 말할 수 있는 곳은 자신이 칠했던 벽뿐이었다. 그곳이 그의 마지막 광장이었던 셈이다.

거리와 광장은 약자의 공론장이다.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는 약자를 위한 것이다. 거리와 광장을 개방하고 집회와 시위를 보장하는 것은 약자의 정치적 공간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지난 10월3일 그 광장이 닫혔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 구시대의 유물이라 생각했던 ‘차벽’이 다시 등장했다. 지하철은 광화문역 등을 무정차 통과했고, 행인들은 검문을 받았다. 명분은 방역과 안전이다. 예정된 집회가 극우단체의 시위였기에, 어떤 민주시민들은 광장 봉쇄가 바람직하다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과연 그래도 될까?

‘표현의 자유’를 극우에게도 ‘똑같이’ 주어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타인에게 침 뱉을 자유를 인종주의자에게 주는 것이 ‘표현의 자유’가 아니듯이 ‘빨갱이 때려잡자’도 허용하는 형식적 평등주의는 오히려 정치적 평등에 위배되는 것이다. 그와 같은 행위에 대해서는 분명한 ‘앵톨레랑스(불관용)’의 원칙과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지금까지 극우 기득권 세력의 반사회적 행위에 대해 불관용 원칙을 수립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반대로 노동자와 약자들의 정치적 행동에 대해서는 기존에 용인되던 관용도 철회해왔다. 정부가 재벌에게 관용을 베풀고 기득권 세력과 타협하는 대신 적폐세력과 맞서 싸우면서 촛불광장의 요구를 제대로 이행했더라면, 태극기부대가 지금처럼 광장을 가득 채울 기회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안전이냐, 자유냐’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누구의 안전과 누구의 자유냐가 문제다. 안전하지 못한 이들이 자유도 없고, 안전한 사람들이 자유도 누린다. 안전을 위해 힘없는 자들의 광장이 봉쇄될 때도, 자본가와 권력자의 공론장은 늘 보호받고 있다. 그들은 국회정론관을 가졌고, 신문과 방송을 가졌고, 비싼 회의장을 빌릴 수도 있으며, 그곳으로 학자와 전문가를 부를 수도 있다. 그들의 공론장은 한 번도 봉쇄된 적이 없다. 반면에 노동자들은 너무나 쉽게 가졌던 장소를 뺏긴다.

2000년대 초 독일에서 극우세력이 갑자기 부상했을 때였다. ‘독일 같은’ 민주국가에서 네오나치가 나오는 것이 의아했다. 마침 옆에 독일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사람이 있어 물어보았다.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사람들이 드러난 것일 뿐이라고 했다. 이들이 전후 40년간 자기 집에서 숨어서나 하던 말을 광장에 나와 떳떳이 할 수 있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그들에게 용기를 준 것이 ‘진보의 배신과 전향’이라고 그는 진단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진보라는 정권의 우경화와 그 집단의 위선과 부패는 폭로될 때마다 우파에게 자신감을 준다.

당시 독일에선 극우 집회가 벌어지면 광장의 봉쇄가 아니라 시민들이 더 큰 목소리로 혐오와 차별의 목소리를 봉쇄함으로써 약자의 광장을 지켜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했을까? 이 상황이 장기화될 것이라면 더욱더, 광장이 필요한 이들에게 안전하고 자유로운 장소가 될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정치의 공간은 통치자가 구획한 금지와 허용의 선 안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안전을 명분 삼고 극우에 반대해서 차벽을 허용할 때, 노동자의 광장은 극우와 자본과 국가에 차례로 빼앗긴다. 그다음 차벽은 당신 앞을 가로막을 것이다.

<채효정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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