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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공인’의 청문회가 시작되었다. ‘내로남불의 전시회’라는 조롱이 쏟아진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지나친 가족사랑’이 문제다. 국가 연구재단의 지원을 받는 해외 학술대회에 가족여행 가듯 자녀를 데리고 간다. 자기 제자 논문에 남편의 이름을 여러차례 올린다. 어쩜, 하나같이! “니가 왜 거기서 나와?” 탄식을 자아낸다. 흥분을 가라앉히면, 한국인 모두 가족을 위해 공적 자산을 마구 활용하는 게 훤히 보인다. ‘온 나라 세습하기’ 경합이 벌어지고 있다. 천국을 갈망하는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왜 이렇게 한국 사회에는 가족사랑이 넘쳐날까?
베버의 ‘세상 부정적 사랑’은 이에 대한 하나의 답을 준다. 이 용어의 원어는 독일어 Liebesakosmismus이다. Liebe는 ‘사랑하다’, a는 ‘없다’, kosmismus는 ‘세상’이라는 뜻이다. 직역하면 “무세상을 사랑하다” 정도다. 영어에는 이 용어가 없어 번역할 때 골머리를 앓았는데, 굳이 바꾸자면 acosmistic love(무세상적 사랑) 또는 acosmism of love(사랑의 무세상)이다. 이렇게 번역해도 뜻은 알쏭달쏭한데, 무세상주의자로 알려진 스피노자를 참조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결코 신을 부정하는 무신론자가 아니다. 오히려 세상이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그에게는 신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베버의 종교사회학에 정통한 미국 사회학자 로버트 벨라는 이러한 뜻을 살리기 위해 world-denying love(세상 부정적 사랑)라는 번역어를 선택한다. 가족과 친구만 사랑하는 세속적 사랑(worldly love)에 대립해서 만인에 대한 사랑, 즉 친구든, 이방인이든, 적이든 가리지 않고 누구든 차별 없이 사랑하는 것을 뜻한다. ‘세상 부정적 사랑’은 특정 개인이 아니라 누구나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보편적이다. 어떤 대상에도 고착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대상 애착을 초월할 뿐 아니라, 뒤집으면 극도의 나르시시즘이 나타난다. 그래서 세상 부정적 사랑은 현세의 모든 사회 영역과 날카로운 긴장 관계를 형성한다. 베버는 서구 문명의 합리화 과정이 세상 부정적 사랑과 세상 영역 사이의 날카로운 긴장에서 발생했다고 말한다.
친족 영역은 세상 부정적 사랑과 가장 먼저 긴장 관계에 들어간다. 누구든 가리지 말고 형제로 사랑하라는 세상 부정적 사랑은 오로지 초월적이고 보편적인 신만을 사랑하라는 ‘불가능성의 명령’이다. 이러한 명령은 가족 유대의 핵심인 친족과 결혼제도의 가치를 떨어트린다. 세상 부정적 사랑의 신 예수를 예비하는 임무를 띤 세례요한은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떠벌리는 유대인을 질타한다.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내 친족을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취급하다니. 어처구니없지만, 덧없는 현세를 넘어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명령을 떠받든다.
베버의 설명을 들으면 한국 사회에는 과연 세상 부정적 사랑이 있기는 한 것인가 의문이 든다. 겉으로는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하고 합리화한 것 같은데, 속을 들여다보면 특수한 가족주의 윤리로 뒤범벅되어 있다. 사회학자로서 답답하지만, 굳이 꼽자면 한국 사회에서 세상 부정적 사랑에 해당하는 것은 민족주의일 것이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라는 보편적 형제애 윤리를 통해 온 국민을 똑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을 실행한다. 문제는 민주주의가 우리 모두 한 핏줄이라 부르짖는 혈족적 민족주의 안에서 작동한다는 것이다. 피를 나눈 국민이 온갖 고난의 현대사를 뚫고 정작 마주한 건 갈가리 찢긴 세습적 신분 사회다. 민족주의가 보편적 형제애 윤리를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니, 가족주의 윤리와 날카로운 긴장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다. 가족 연대가 사적 영역으로 분화하지 못하고 공사를 넘나들며 온 사회를 지배한다. 모두 ‘내로남불’일 수밖에….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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