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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다른 지역에서 혐오와 차별에 관한 토론회가 있었다. 저녁을 먹고 가라는 호의를 덥석 받아 발표자들과 함께 식당으로 갔다. 주최 측에서 기차역 인근으로 예약해주셨다. 유명한 곳이라 사람이 바글바글했고 우리는 깊숙한 안쪽에 자리를 잡았다. 토론회를 같이 준비하셨던 분들이 더 온다고 했다.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데 뒤늦게 오신 분들이 못 들어오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한 분이 아이를 데리고 오셔서 식당 주인이 막는다는 얘기였다.
몇 분이 나가보셨는데 이내 식당 주인의 고성이 들렸다. “아이들은 안 된다고 다 써붙였는데 왜 예약해서 바쁜 사람 피곤하게 하는 거야?” 그제야 식당 벽에도 붙어있는 아이 동반 출입금지 안내문이 보였다. 주최 측도 일행이 아이를 데리고 올지는 몰랐나 보다. 일행을 다른 곳으로 보내려는 듯했다. 난감했다. ‘노키즈존’이 차별이라는 국가인권위 결정도 있은 후였다. 눈앞에서 명백한 차별행위가 발생하고 있었다. 내가 따라 나가서 항의해야 하나? 그런데 내가 나서서 차별이라고 따지면 다른 분들이 무안하지 않으려나? 그러다가 모두 다 나가야 하는 상황이 되면 내가 책임질 수 있나? 항의해서 아이가 들어오면 눈치 보지 않고 밥을 편안하게 먹을 수 있으려나?
결국 늦게 오신 분들은 식당에 들어오지 못했다. 나는 가만히 앉아 주문된 음식을 먹었고 노키즈존 같은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돌아오는 기차에서 여러 번 곱씹었다. 지금까지도 곱씹는다. 주최 측에서 판단할 문제라고 미뤄놓은 부끄러움은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러나 어떻게 했어야 할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나는 차별금지법제정연대 활동을 함께한다. 가끔은 이게 뭐라고 이렇게 열심히 하는지 나도 모르겠다. 법이 만들어진다고 노키즈존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리 없고, 어디 신고하면 누가 잡으러 오는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아이들이 방해된다거나, 다칠까 걱정하는 거라며 식당 주인을 편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달라질 나를 기대해본다. 사뿐사뿐 걸어나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사장님, 이러시면 안 되죠.” 나는 그를 당황하게 만들 것이다. 차별받는 사람 대신 차별하는 사람이 당황하게 되는 순간, 거꾸로 섰던 세계는 바로 설 것이다. 인권의 상식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박근혜 퇴진 촛불 이후, 인권활동가들은 서로 물었다. “국가보안법이 먼저 폐지될까, 차별금지법이 먼저 제정될까?” 둘 다 문재인 정부 국정과제에서 누락된 현실을 씁쓸해하는 농담이었다. 하지만 기대를 다 내려놓지는 않았다. 모두 참여정부 시절 정부·여당이 추진했던 사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어’, 4년째 소식이 없다.
차별금지법 제정하고 국가보안법 폐지하자. 붙여놓으면 생뚱맞아 보여도 인권활동가들에게는 어색하지 않다. 한국의 인권현실을 상징하는 구호가 된 지 오래기 때문이다. 지금의 정부와 여당도 모르지 않는다. 과거에 이런 신념을 당당하게 밝혔던 정치인 중 한 사람이 문재인 대통령이기도 하다. 지금도 정부·여당은 ‘안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한다’는 말을 하지 않을 뿐이다. 시급성이 덜해졌나 하면 그렇지도 않다. 혐오가 더욱 확산되고 한반도 평화는 멈칫거리는데 십수 년 전보다 중요성이 덜할 리 없다. 반대하는 이들 때문에 어렵다는 우는 소리도 듣는데, 모두가 찬성하는 일만 할 거라면 정치는 왜 하나.
요즘 나는 연일 야근이다. 5월25일 시작하는 차별금지법 국민동의청원을 준비하느라 그렇다. 국가보안법 폐지 청원은 어제 시작됐다. 경황 없을 동료들의 안부도 걱정이다. 하지만 달라질 우리를 기대해 본다. 인권의 상식을 찾으려 움직이기 시작한 시민 10만명은 더 이상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랏돈 받아 일하며 딴청만 피우는 이들에게 말할 것이다. 지금, 이러시면 안 되죠.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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