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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겨울 첫 직장에 입사할 때, 엄마가 구두를 한 켤레 사주셨다. 첫 직장은 캐주얼 차림으로 출근이 가능한 곳이어서 구두를 신을 일이 거의 없었다. 편한 복장으로 일하는 곳이었다. 구두는 이따금 경조사가 있을 때면 꺼내 신곤 했는데, 그때마다 발에 맞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얼마 전 신발장에서 마주한 구두는 잔뜩 낡아 있었다. 신는 횟수와 상관없이 시간이 흐르면 마모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 구두가 8년째 신발장 안에 있다. 낡을 대로 낡았지만 도무지 버릴 엄두가 나지 않는다.
가뜩이나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는 나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다름 아닌 신발이다. 신발을 신고 돌아다닌 시간이 신발 안에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을 것만 같아서다. 신발을 보면 거기에 얽힌 추억 한두 가지는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이 신발을 신고 청계산에 오를 때 발바닥이 닳는 줄 알았지, 저 운동화를 신고 외출한 날에는 소낙비가 내려 온몸이 흠뻑 젖고 말았지, 저 운동화는 세탁할 때마다 색이 옅어져서 나중에는 무늬조차 하얗게 될지 몰라, 저 신발을 처음 신었던 날 똑같은 신발을 신은 친구를 만나서 얼마나 무안했던지….
신발장이 꽉 찬 것도 모자라 미어지기 직전이어서 기어이 신발을 버려야 하는 날이 찾아왔다. 갈팡질팡하는 나를 위해 형이 버려야 할 신발들을 골라주었다. 딱 봐도 다시는 못 신을 것 같은 신발들이라고 했다. 설명을 들으니 수긍되긴 했지만, 신발을 버리러 나가는 형을 따라나서지는 못했다. 발이 더 이상 자라지 않게 된 이후, 나는 신발 끈이 서로 매듭지어 연결되는 상상을 하곤 했다. 걷기를 좋아하는 나는 어떤 신발을 신고도 묵묵히 걸을 수 있었기에, 모든 신발은 나의 발자취와도 같았다. 형이 구두를 집으려는 찰나, 반사적으로 가로막았다. “이건 안 돼. 나의 처음이야.”
엄마가 사주신 구두를 신고 장례식장에 가던 날이 떠오른다. 1년에 몇 차례 신지 않는데도 해가 갈수록 신발이 편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두에 맞게 내 발이 변하는 것일까, 내 발에 맞게 구두가 몸을 바꾼 것일까. 횟수를 곰곰이 따지면 전자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후자가 맞을 것이다. 구두가 맞춤 신발로 탈바꿈한 것 같았다. “새 옷을 사줘도 꼭 저 옷만 입더라.” 생전에 아빠가 외출할 때마다 엄마는 핀잔을 하듯 저 말을 했었다. 문득 낡아가는 것은 편해진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발장의 공간이 부족했는지 장례식장 입구에는 구두들이 즐비했다. 구두를 벗으며 다른 이들의 구두를 슬쩍 바라보았다. 앞코가 하얘진 구두, 뒤축이 해질 대로 해진 구두, 새로 산 듯 반질반질 윤이 나는 구두, 발바닥 닿는 부분이 벗겨진 구두, 징을 박아 넣은 구두도 보였다. 엇비슷해 보이는 구두는 저 흔적들로 인해 비로소 ‘나의 구두’가 되었을 것이다. 사물에도 손길이 필요하다. 손때가 묻어야 정이 들고 발길이 이어져야 생명력이 유지된다.
엄마는 요새 친구의 집에 오간다. 1년 동안 해외 출장을 가게 된 친구가 엄마에게 이따금 집에 들러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반려식물이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집도 사람 손이 끊기면 금세 생기를 잃어버려. 들어가서 자리에 앉아 숨도 쉬고 창문 열어 환기도 시켜줘야 해.” 지난 주말, 책장을 정리하다 구입해놓고 읽지 않은 책들에 생각이 가닿았다. 사두고 단 한 번도 펼쳐보지 않았는데, 표지가 잔뜩 바래 있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버석거리는 소리가 났다. 손때 묻은 책은 술술 넘어가는데, 구입하고 나서 방치한 책들이 오히려 위태로웠다. 앞장과 뒷장이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손이 끊겨서 그런 것 같았다.
손발이 닿는 존재를 하나하나 떠올려본다. 매일 이용해, 가끔 사용해 소중함을 잊어버린 것들. 손끝이 저리고 발뒤꿈치가 들썩인다.
<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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