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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문화와 삶

인류의 멜로디

opinionX 2020. 7. 16. 10:51

20세기를 살았던 이들에게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은 삶의 순간 곳곳에 새겨진 나이테와 같다. ‘주말의 명화’에서 <석양의 무법자> 주제가를 들으며 총잡이를 꿈꾸고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의 ‘데보라의 테마’, <미션>의 ‘가브리엘의 오보에’를 듣기 위해 심야 FM에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동네 레코드 가게로 뛰어가 테이프나 LP로 이 앨범들을 샀을 것이다. <시네마 천국>을 본 후 짝사랑하던 이에게 고백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설령 다른 장소, 다른 시간에 있었을지라도 그의 음악은 인생의 어느 지점에 침투해 들어왔다. 그리고 그곳에 영원히 자리 잡았다. 영화의 사운드트랙을 넘어, 삶의 사운드트랙이 됐다. 영국 출신 감독 에드가 라이트는 모리코네의 업적을 압축적으로 표현한다. “그는 평범한 영화를 필견의 작품으로, 좋은 영화를 예술로, 위대한 영화를 전설적 작품으로 만들 수 있었다.”

로마의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음악을 전공한 그는 20대 중반부터 드라마 음악을 만들기 시작했다. 클래식과 대중음악 전반에 걸쳐 활동하던 그를 처음 알아본 건 동향 출신으로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세르지오 레오네였다. <황야의 무법자> <석양의 무법자>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 <석양의 갱들>과 같은 스파게티 웨스턴이 모리코네의 이름을 세상에 알렸다.  주인공은 언제나 정의의 편이었던 정통 서부영화와 달리 스파게티 웨스턴은 잔혹했으며 인간의 욕망을 보다 적나라하게 드러내곤 했다. ‘미국의 신화’에 얽매여있지 않던, 이탈리아인들이었기에 가능한 해석이었다. 모리코네 또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시도들로 스파게티 웨스턴 특유의 분위기를 직조했다. 녹음 기술이 아직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 마이크의 거리 조절을 통해 소리의 원근을 표현했다. 이를 통해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사람들은 텍사스의 흙먼지와 함께 황야를 달려오는 주인공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이 머지않아 닥칠 것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획일화된 정의가 아닌, 비정한 약육강식의 세계에 엔니오 모리코네는 새벽과 황혼의 색을 칠했다.

그가 이해하여 표현한, 영화의 에센스는 멜로디였다. 그의 음악이 인류의 마음에 각인될 수 있었던 힘이다. 그의 멜로디는 사운드의 빙판에서 춤추는 피겨 선수와 같은 멜로디처럼 우아했다. 안개를 뚫고 등장하는 구도자처럼 신성했다. 스파게티 웨스턴 시절부터 <미션> <시네마 천국>으로 상징되는 1980년대,  2016년 <시크릿 레터>까지 멜로디에 대한 모리코네의 심경은 굳건했다. 아무리 훌륭한 영화라 해도 주연 배우의 호연 없이는 완성될 수 없는 것처럼, 그가 창조한 소리의 세계에는 멜로디라고 하는 중심이 있었다. 영화음악가 한스 치머는 “엔니오 모리코네는 가장 심플하고 순수하며 정직한 멜로디야말로 만들기 가장 어려운 것임을 알려줬다”고 말했다. 들어보지 못했던 영화의, 들어보지 못했던 음악마저도 그의 멜로디는 마음을 파고든다.

그의 인생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거론되어야 할 인물은 주세페 토르나토레다. 1988년 두번째 작품인 <시네마 천국>으로 시작된 둘의 인연은 <피아니스트의 전설> <말레나> 등 토르나토레의 모든 작품에서 이어졌다. 모리코네는 그의 의뢰를 우선적으로 받아들였고 토르나토레는 모리코네에게 제작 일정을 맞추곤 했다. 모리코네의 마지막 영화음악 작품이 토르타토레의 <시크릿 레터>였다. 토르나토레는 이 작품 이후 4년 동안 모리코네를 위한 다큐멘터리 <음악의 시선>을 만들어왔다. 오는 8월 공개 예정인 이 작품에는 모리코네 본인의 인터뷰를 비롯하여 존 윌리엄스, 한스 치머, 팻 메시니, 폴 사이먼, 존 바에즈, 퀸시 존스, 제임스 헷필드, 브루스 스프링스틴 등 대중문화계의 거물들이 바치는 헌사로 구성된다. 세계는 이 작품을 통해 비로소 마에스트로를 추억하며 떠나보낼 수 있을 것이다.

<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 noisepo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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