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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많은 전문가가 이미 예견했던 것처럼 유럽은 가을로 접어들면서 다시 코로나19 위기로 치닫고 있다. 백신이나 확실한 치료 방법이 없는 상황은 올해 봄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동안 방역수칙의 준수나 방역행정의 개선 등으로 위기에 대처한 경험은 있으나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위기의 장기화에 따른 누적된 피로감은 종종 사회적 불만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코로나 위기 관리는 흡사 정치의 모든 것처럼 되었고 민주주의의 근간이 흔들리는 모습도 곳곳에서 보인다.

이와 더불어 코로나가 창궐하는 지역이나 국가에서 오는 여행객의 이동을 제한하는 조치는 유럽 통합이라는 오래된 희망마저 어둡게 만든다. 유럽이 냉전기를 포함한 전쟁이 아닌 상황에서 이렇게 이동과 이주의 자유가 심하게 제한당한 적이 없었는데 코로나 바이러스가 상황을 일변시켰다.

한편에서는 코로나 위기에도 불구하고 ‘지구화’로 표현되는 일련의 현상 가운데 정보를 포함한 시장경제적인 상호의존성의 고도화는 지속할 것으로 내다본다. 코로나 위기는 경제 내적인 요인보다는 경제 외적인 요인이고, 지구화는 아직 그의 꼭짓점을 지나지 않았다는 점을 이유로 들고 있다. 그러나 루프트한자와 같은 한 나라의 상징적인 기업의 ‘국유화’가 논의되는 상황도 생겼다. 따라서 개별 국가의 적극적인 시장 개입으로 인한 상호경쟁적인 ‘탈(脫)지구화’는 코로나 위기로 본격화될 것으로 내다본다. 이런 상이한 판단은 코로나 위기의 객관적인 조건을 반영한다기보다는 위기를 해석하고 구성하는 방식 간의 차이에 있다고 본다.

이러한 대칭적 전망을 넘어서려는 이른바 ‘지구적 지역화’라는 절충적인 입장도 있다. 우리말로 ‘세방화(世方化)’로 번역되기도 하는 이 개념은 1980년대 말부터 등장했는데 어떤 지구화도 지역적 기반을 떠나서는 성립될 수 없다는 점을 특별히 강조한다. 자주 이야기되는 ‘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는 주문이 이를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다. 지구적인 경영철학 속에서 지역의 특수한 미각을 담아내는 맥도널드의 성공 신화가 이러한 사례로 자주 인용된다. 그러나 지구적 지역화가 다양성을 매개로 한, 또 다른 형태의 지구화라는 비판도 있다.

유사한 비판은 유럽 통합과 관련해서도 제기된다. 지구화의 일환인 유럽 통합이 사실은 유럽의 ‘독일화’라는 내용이라는 비판이다. 특히 코로나 위기를 맞아 재정적으로 어려워진 유럽연합의 성원 국가들 사이에서 이런 주장은 팽배하다.

유럽의 과거사를 반추하면서 제기되는 이러한 비판에 독일은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나치 집권 이후 미국으로 망명했던 토마스 만이 전후에 ‘독일-유럽적’ 대신에 ‘유럽-독일적’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지역적 이해의 강조가 배타적인 ‘지역 애국주의’를 낳고 이로 인한 갈등이 크고 작은 전쟁으로 치달은 쓰라린 경험을 가진 유럽에서 ‘유럽시민’이나 ‘세계시민’을 향한 갈증과 희망은 그래서 특히 컸다. 프로이센과 프랑스 사이에 이루어졌던 바젤 평화조약(1795)을 맞아 발표된 칸트의 <영구평화론>이 20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그러나 지역갈등을 넘어 평화의 세계를 이루려는 많은 발상은 종종 현실성이 없다는 평가를 받거나 기껏해야 교육적인 의미가 있다는 정도로 이해된다. 심지어 뿌리 없는 지식인의 사해동포주의적인 지적 유희로까지 폄하되기도 했다. 코로나 위기로 개인들은 물론, 국가나 지역들도 모두 각자도생(各自圖生)해야 한다는 절박감에 이런 분위기는 지금 더 심해졌다.

예를 들면 난민, 인권, 평화, 지구온난화와 같은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사람을 두고 주로 비꼬는 의미로 사용하는 ‘구트멘셴(Gutmenschen·좋은 사람)’이라는 단어가 독일에서 얼마 전부터 자주 등장한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도 못 끄는 주제에 구구절절 옳고 좋은 소리로 마냥 가르치려 들며 귀찮게 구느냐고 비난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심지어는 ‘좋은 사람? 사절합니다!’라는 스티커까지 등장한다.

그리스 모레나에 있는 난민수용소의 화재로 인해 노숙하게 된 시리아 난민들을 선뜻 받아주겠다는 나라도 별로 없다. 난민이 코로나 바이러스의 전파자일 수 있다는 불안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코로나 위기로 침체한 경기 부양을 위해 단기간에 약 12조달러를 세계가 쏟아붓지만, 이의 적은 부분으로도 파리기후협약의 목표치를 달성하는 데 크게 이바지할 거라고 ‘사이언스’ 최근호가 주장한다. 그러나 이에 귀를 기울이는 정치인은 별로 없다.

코로나 위기는 물론 한 세기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엄청난 재앙이다. 그러나 머지않아 이 위기는 끝날 것이다. 그다음에 다른 재앙이 우리를 또 기다릴 것이다. 어느 정도 예상되는 것도 있고 코로나처럼 예상치 못한 재앙이 올 수도 있다.

걱정도 팔자라는 말처럼 미래에 있을 재앙만을 생각하고 너무 앞선 주장을 펴거나 큰 변화를 요구하면 쉽게 ‘도덕적 테러리스트’로 취급받는다. 2011년 독일어 ‘Gutmenschen’은 ‘의미 없는 신조어’로 선정되었다. 달리 생각하는 사람의 논지도 살피지 않고 이들을 곧장 매도해서 정치적 행위의 합리적인 방향 설정을 저해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비록 주위를 불편하게 만들 수 있지만 다른 사람과 함께 세계를 변혁시키려는 더 많은 ‘좋은 사람’을 바로 코로나 위기가 요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좋은 사람은 인내심을, 나쁜 사람은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처럼 지금 우리는 큰 인내심이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학교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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