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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설악산 단풍을 담은 사진을 받아보았다. 독일에선 볼 수 없는 자연이 빚어낸 화려한 색조다. 독일의 11월은 비, 바람 그리고 어두움이 가득 찬 시간의 시작이다. 뛰어난 토목기사이자 시인인 하인리히 자이델은 시 ‘11월’에서 “이런 달을 정말 칭찬해야 한다/ 아무도 이처럼 날뛰지 않는다/ 아무도 이처럼 불쾌하게 만들지 않는다/ 게다가 햇살도 없이/ 아무도 이처럼 구름 속에서 시끄럽게 굴지 않는다/ 아무도 이처럼 폭풍으로 으스스하게 만들지 않는다/ 모든 것을 얼마나 축축하게 만드는지/ 그렇다, 정말 굉장하다”라고 독일의 11월 날씨를 저주했다. 작년 여름 포르투갈의 따뜻한 해변마을로 이주하기 전까지 아침 운동 때 나는 거의 매일 이 시인이 누워있는 공동묘지 옆을 지났다.
힘을 잃어가는 햇살이 젖은 땅 위에 뒹구는 낙엽 위에 외롭게 서 있는 나무들을 위로하는 11월은 죽은 자의 영혼을 기리는 시간이기도 하다. 독일에선 ‘만성절’, 전몰 장병과 희생자를 기리는 ‘국민애도일’, ‘참회와 기도의 날’, ‘망자를 위한 추도 일요일’이 모두 11월에 있는 행사다. 깊어가는 종교의 계절이라는 유안진 시인의 ‘11월’이라는 시를 새삼 떠올리게 한다.
코로나19 사태로 올해의 11월은 더 침울하고 어두운 달이 되었다. 그동안 상대적으로 코로나19 위기가 심하지 않았던 포르투갈조차도 얼마 전부터 비상이 걸렸고 일부 지역에는 통금도 실시되었다.
코로나19 재앙을 맞아 온종일 넘쳐나는 뉴스는 무척 다양하다. 공포, 불안, 고통과 같은 단어들이 종종 코로나19 사태로 개인이나 사회가 알게 모르게 겪는 아픔을 표현하고 있지만 방역지침이나 머지않아 시중에 나올 백신, 경제위기와 관련된 대응과 같은 건조한 내용이 보도나 논평의 대부분을 채운다.
전자현미경의 흑백사진을 통해 그의 비밀스러운 형태를 드러낸 코로나 바이러스는 여러 가지 색상과 도안으로 처리돼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다. 지금까지 135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코로나19는 개인이나 사회에 나타나는 위험에 대한 인식의 일반적인 틀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처음 코로나19가 급속히 번졌던 올해 봄만 해도 이 바이러스에 대한 정보나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집단적인 공황장애(恐慌障碍) 같은 분위기마저 있었다. 그동안 구체적 위험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와 지식이 축적되면서 공포와 불안은 여전하지만 그때처럼 이를 관리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지는 않다.
어떤 의미에서 적정한 수준의 공포와 불안은 인간의 자기보존을 위해서는 필수적이기도 하다. 동물이 교감신경을 전반적으로 잘 통제해 위협에 대응, 싸우거나 아니면 도망칠 수 있도록 준비한다는 미국의 생리학자 월터 캐넌의 ‘투쟁-도주 반응’ 이론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는 인간이 본래적인 자신이 될 수 있게끔 하는 불안의 적극적 의미를 강조한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의 논거와도 궤를 같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코로나19의 실제적 위험에 부응하는 공포와 불안의 적정한 제어나 통제가 이론처럼 그렇게 쉽지 않다. 그래서 공포와 불안을 의식적으로 부정하거나 회피하고 모두 다 불안에 떤다는 식으로 일반화하는 논거에 기대어 자기 위안을 찾기도 한다. 심지어는 트럼프처럼 코로나19와 싸워 이겼다는 식으로 공포와 불안에 대한 ‘영웅적’ 투쟁을 자랑하기도 한다.
코로나19의 위험은 무엇보다도 무서운 감염과 전파력에 있다. 따라서 불안이나 공포는 결코 개인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고 - 물리적(사회적) 거리 두기나 마스크 착용처럼 - 자신도 포함된 환경을 생각하고 주위 사람을 배려할 것을 요구한다. 코로나19의 감염경로를 보여주는 지도는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해준다. 이는 또 ‘이것이 있으면 저것도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불교의 연기법(緣起法)이나 ‘나는 타자의 인질이다’라는 프랑스의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가 강조하는 타자의 윤리학을 상기시킨다.
이런 불안과 공포감 그리고 배려와 연대와는 다른 반응도 나타난다. 바로 분노의 표출이다. 장기화하는 긴장이 임계점에 거의 달하는 상황에서 ‘코로나는 거짓말이다’라고 쓰인 팻말을 들고 시위를 벌이는 이른바 ‘성난 시민’이나 ‘삐딱하게 생각하는 사람’의 숫자는 늘고 있다. 여기에는 실업자, 영세상인, 중산층, 각종의 음모론 신봉자, 자유주의자, 반유대주의자, 극우파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노를 모르는 영혼은 무기력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합리적 논거 없이 표출되는 분노는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켜 공동체의 토대를 허물 수 있다.
새해를 맞을 때만 해도 아무도 예견치 못한 코로나19가 그간 가져다준 엄청난 재앙으로 인해 모두가 힘들어하는 이 한 해도 이제 곧 작별을 고하게 된다. 내년에는 백신의 힘을 빌려 이 비극의 어둡고 긴 굴을 빠져나올 수 있다는 기대도 따라서 클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는 현대과학에 큰 희망을 걸지만 그러면서도 지금까지 우리가 지녔던 삶의 방식만으로 세계는 과연 얼마나 더 유지될 수 있을는지를 자주 묻게 된다.
우리 삶의 신조가 된 지 이미 오래된 ‘더 빨리, 그리고 더 많이!’라는 속도와 물량의 철학은 코로나19 백신 개발의 치열한 경쟁에도 그대로 나타나 실시간으로 전 세계의 증권시장을 흔들어 놓는다. 지구촌의 가난한 나라와 가난한 사람의 고통은 첨단의학의 성과나 백신의 존재와 무관하게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세하기 짝이 없는 코로나19는 역설적으로 인간과 자연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건강한 공존을 위한 큰 가르침을 주고 있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학교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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