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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시절이면 많은 사람들이 어린 시절 이야기를 찾는다. 2차 세계대전 중 인간성에 대한 환멸 속에서 무민 시리즈를 쓰기 시작한 동화작가 토베 얀손은 “전쟁 중에 아주 잠깐이라도 불안하고 괴로운 시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고 말한다. 권정생의 동화 <몽실언니>는 군부독재에 짓눌렸던 1981년, 울진의 작은 교회에서 펴낸 청년회지에 처음 실린 작품이다. KBS의 <TV동화 행복한 세상>은 2001년 4월에 시작되었는데 이때는 너도나도 실의를 겪은 외환위기 무렵이다. 같은 해 MBC가 선정한 느낌표 도서 1호는 김중미의 동화 <괭이부리말 아이들>이었고 황선미의 동화 <마당을 나온 암탉>은 이듬해 초 출간됐는데 당시 수많은 어른 독자들이 이 책을 찾았다. 어른들은 왜 자신을 일으키고 싶을 때 동화의 힘을 빌리는 걸까.

동화 속 인물들은 새로 고침의 폭이 넓다. 성장 중인 인물이 만드는 서사의 역동성은 남다르다. 아동문학을 읽는 시간은 어른에게도 자신의 과거를 재정립하는 경험을 안겨주며, 아동문학의 비판 정신은 약자와 연대한다. 동화의 세계가 지닌 항상성은 위기에서 내려와 연착륙 가능한 마음의 활주로를 열어준다. 오늘 엉엉 울었다 해도 내일 또 만나서 놀 수 있을 거라고 약속한다. 본래는 불안에 잠 못 드는 어린이를 안심시키기 위한 약속이었지만 지친 어른도 다독이는 말이다. “내가 자라면 세상은 달라질 거야”라는 어린이의 장담도 그렇다. “달라질 거야”라는 말을 들으면 기운이 난다.

그래서인지 어른들이 동화를 자주 찾는다는 통계가 나오면 그만큼 성인의 우울지수가 높아졌다는 신호는 아닐까 들여다보게 된다. 아동문학이 현실의 절망을 대체할 무해함으로만 호출되는 것은 아닐까 염려되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복잡하게 얽힌 책임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을 때 리셋 버튼을 매만지듯이 동화책을 집어들기도 한다. 그럴 때 먼저 손이 가는 동화책은 나를 조건 없이 사랑해주는, 덜 공격적인 책이 많다. 안온한 그림과 문장을 꿀꺽 복용하고 나면 잠시 내가 이 시대의 온전한 피해자라고 느껴진다. 지금의 불안과 동떨어진, 사회적 책임 이전의 존재로 ‘어린 시절의 나’를 소환한다.

“옐로 피버, 아시아 여성 향한 왜곡된 선호”라는 제목으로 ‘시사인’ 709호에 실린 김진경의 글을 읽었다. 서구에서 ‘아시아 여성’에 대한 호감도가 높은 현상의 이면에는 ‘아시아’와 ‘여성’을 자신들의 지배 대상으로 생각하는 이중적 편견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트렌드나 콘텐츠로 어린이를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 안에도 이와 유사한 이중성이 있다. 어떤 존재가 무난한 호감과 함께 회자된다는 것은 그 존재의 개별적 권리가 정확히 반영되지 않고 있으며 포괄적 옹호의 감정 안에 주체의 목소리가 뭉뚱그려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은 본래 요란하며 좋은 아동문학은 안온하지만은 않다. 어린이가 걷어차고 반격할 수 있는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동문학의 목표 중 하나다. 우리는 언제나 ‘아이처럼’ 지난 시간으로 되돌아가 나를 돌아볼 수 있지만, 어른이라면 ‘어른답게’ 어린이에게 걷어차일 대비를 해야 한다.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는 것이 그 기본이다.

물론 최근의 어린이 열풍은 과거의 어린이 향수와 상당히 다른 측면이 있다. 어린이를 하나의 세계로서 정중하게, 독립적으로 바라보려는 시선이 두드러진다. 어린이 곁에서 생활하지 않는 비양육자 어른들의 관심이 적극적인 점도 눈에 띈다. ‘어른을 위한 동화’라는 접근의 한계를 이해하는 ‘어른의 동화읽기’가 늘고 있는 것이 반갑다. 어린이날이 다가온다. ‘어린이가 더 행복할 방법을 구체적으로 연구하는 연구소’의 회원을 모집하고 싶다. 아마 그 연구의 가장 큰 수혜자는 어른이 될 것이다.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 아동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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