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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6일,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에서 주최한 ‘작곡가 아틀리에 렉처’에서 음악 연구자 이희경이 한국 근현대음악사의 지난 궤적과 문제의식들을 톺아보는 강의를 진행했다. 오케스트라와 함께 동고동락할 상주 작곡가를 곧장 초대하는 대신 2년간 다섯 명의 작곡가에게 오케스트라 리딩, 멘토링 등의 지원을 제공한 뒤 상주 작곡가를 선발하는 ‘작곡가 아틀리에’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이 작곡가들을 위해 연 첫 강의가 한국 근현대음악사를 다루고 있다는 점은 꽤 의미심장했다.

강의 서두에서 이희경은 ‘오늘의 작곡가 오늘의 작품’에 소개된 한 일화를 소개했다. 당시 한 창작자는 “작곡의 역사는 앞선 세대와 대결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데, 우리나라의 작곡가들은 그 대결 상대를 주로 외국에서 찾는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예컨대 윤이상, 강석희와 대결하지 않고 각자가 수학한 유학지에서 활동하는 작곡가와 대결한다는 것이다. 그건 아마도 한국에서 어떤 작곡가가 무슨 일을 해왔는지 잘 모르기 때문이거나 이곳에서 벌어진 일들이 ‘나의 역사’처럼 느껴지지 않기 때문일 테다.

그런 문제의식하에서 강의는 정치·사회사와 함께 휘몰아쳤던 한국 근현대음악사의 주요 장면들을 통해 이전 세대 작곡가들이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왜 추구해왔는지 짚어나갔다. 또 지금 우리가 모인 이 자리 ‘작곡가 아틀리에 렉처’에도 어떤 과거가 누적돼 있는지, 그 역사와 현재의 연결고리가 뭔지도 중요한 이슈였다. 강의에선 한국에 가장 처음 유입됐던 서양악기나 최초의 오케스트라 등 역사적 사실 이야기뿐 아니라 정치적 이념 대립이 만들어낸 음악사 속 변화, 당대의 주요한 쟁점들도 폭넓게 다뤄졌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 서양음악 전공자 중 한국의 근현대음악사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 역사가 왜 중요한지, 그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체감할 기회가 사실상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쩌다 보니 피아노를 얼렁뚱땅 치다가 말러의 교향적 세계가 그리는 환상에 취해 10대 시절을 보내고, 서울시향의 ‘아르스 노바’ 공연 시리즈를 보고 현대음악의 멋에 빠져들었다. 그러다 보면 이따금 내가 이 머나먼 음악과 도대체 어떻게, 그리고 왜 가까워지게 된 것인지 모르겠었다. 앞서 이 음악으로 향했던 이들이 누구인지, 그들도 나와 비슷한 마음이었을지도 알고 싶었다. 이것은 나 자신에 대한 물음이기도 했지만, 역사적인 질문이기도 했다.

하여, 내가 생각하는 음악의 범주와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그 생각이 어떤 조건하에서 형성됐는지 파악하기 위해 지난해부터 느릿하게 근현대음악사를 공부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지금의 나를 만든 토양이 무엇이었는지 아주 조금이나마 역추적해나갈 수 있게 됐다. 아마도 1900년경에 대구에 피아노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선교사들이 종교와 함께 음악활동을 하지 않았다면, 외갓집 가족들이 선교사들과 마주하지 않았다면, 어머니가 피아노를 동경하는 소녀로 자라지 않았더라면 나는 서양음악을 접하지 않게 됐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작곡가 윤이상이 강석희에게 ‘음악제’의 중요성을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강석희의 제자들도 그 이야기를 듣고 제각각의 멋진 음악제를 만들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지금과 전혀 다른 관념을 갖고 음악을 향유하고 있을 것이다.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거대한 사고의 전환을 가져다줄 것이라고는 감히 기대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막연한 오해를 걷어내고, 사고를 날카롭게 가다듬고, 청취자이자 발화자인 나의 조건을 명확히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점만큼은 확실하다. 더욱 분명하게 글쓰고 말하고 싶다는 막연한 소망을 품은 채, 나와 음악사 사이의 잃어버린 연결고리를 찾고 있다.

신예슬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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