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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한국 언론노동운동사에 어두운 한 페이지로 기록될 날이다. 언론중재 및 피해구제 등에 관한 법률(언론중재법) 개정안의 국회 본회의 상정이 예정돼 있다. 이 법안은 더불어민주당이 발의하고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법제사법위원회를 통과하면서 ‘누더기법’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다. 전운이 감돌고 있다. 진보적 성향인 전국언론노동조합(언론노조)과 언론시민단체마저 대부분 등을 돌리고 있다. 반면 171석이라는 압도적 의석수를 차지하고 있는 민주당에선 본회의 통과에 ‘자신감’을 가질 수도 있다. 법안이 통과되면 언론은 개혁될까. 과연 그럴까.
현 사태의 핵심은 언론개혁의 방법론이다. 판단의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사실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경향신문 노동조합 출범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벌써 33년 전 일이지만 ‘공정보도’라는 현재의 언론개혁 과제와 여전히 연결되어 있다.
1987년 6월18일 오후 9시 서울역 광장. 전두환 정권에 항의하기 위해 서울역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던 시민들은 부산·경남행 열차로 발송되려던 경향신문 4만3000여부를 소각했다. 경향신문 기자들은 나흘 후 ‘본지 소각사태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통해 “우리 신문이 이른바 보도지침에 안주하면서 독자보다는 권력을, 객관적 사실보다는 가공된 현실을, 역사적 소명감보다는 일방적 시각을 추종해 온 직무유기의 당연한 귀결”이라고 반성했다.
경향신문 기자들은 행동했다. 기자협회를 만들었다. 이어 1988년 3월18일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당시 경향신문 노조 창립선언문에는 이런 다짐이 담겨 있다. “자유언론 실천과 함께 그것의 기본적 전제인 사내 민주화에 깊이 유의할 것이며….”
국내 주요 언론사 노동자들은 대부분 1987년 민주화 항쟁의 영향을 받아 노동조합을 출범시켰다. 언론사 노조는 여타 노조와 달리 출범 자체부터 공정보도가 일차적 과제였다. 이 명제는 현재도 유효하다. 언론노동자들은 독립언론실천위원회, 민주언론실천위원회 같은 편집제작평의회 수준의 제도적 장치를 통해 편집권을 독립하고 공정보도를 실현하기 위해 분투해 왔다. 적어도 경향신문에서는 권력과 자본보다는 내부의 견제와 비판, 토론이 편집 방향의 잣대가 되고 있다.
상당수 언론사에서는 내부의 부단한 비판으로 편집국장·보도국장이 임기 중간에 낙마하기도 한다. 구성원들의 공정보도 열망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사주와 자본의 논리에 휘둘리는 일부 언론사 노동자들에게는 이 같은 사례가 ‘바람’에 그치기도 하는 안타까운 현실도 남아 있다. 공정보도를 위한 편집권 독립은 여전히 모든 언론인들의 과제이자 숙명이다.
언론노동자들은 수년 전부터 편집제작평의회와 독자권익위원회 같은 편집권 독립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법에 명문화하는 것이 언론개혁의 핵심이라고 판단하고 행동했다. 언론노조의 노력 끝에 국회의원 일부가 ‘신문 등의 진흥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 개정에 화답했다. 우상호 의원(2019년 11월)에 이어 김승원 의원(2020년 11월)이 신문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언론노조 내 4000여명의 신문산업 노동자 중 1313명이 불과 12일 만에 법률 개정안 요구서명에 동참할 정도로 내부의 개혁의지도 상당했다.
국회는 그러나 언론노동자들이 현장에서 만들어 낸 편집권 독립 개혁방안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대신 민주당은 언론중재법이라는 엉뚱한 법 개정안이 마치 언론을 개혁할 수 있는 것처럼 ‘칼춤’을 추고 있다. 명분은 언론개혁이지만 현장의 목소리는 철저히 외면했다. 언론에 재갈을 채우는 법 하나가 진정한 언론개혁인가.
언론중재법 개정안이 이번 국회에서 통과된다면 일부 여당 의원들과 지지자들은 성취감을 맛볼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는 ‘껍데기 개혁’이라고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언론중재법은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는 직후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여부를 판단받아야 하는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본회의 개회를 앞둔 아침, 한마디를 전하고 싶다. 진정한 언론개혁을 바란다면 누더기가 된 언론중재법 개정을 당장 멈춰야 한다. 언론노동자들의 개혁 열망을 담은 신문법 개정부터 진지하게 검토하는 게 첫째다. 이어 언론개혁을 열망하는 언론노동자들과 머리를 맞대고 언론 현장의 다양한 개혁 현안들을 논의하는 게 순서다.
한대광 전국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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