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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대선 전 마지막 칼럼에 꼭 담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1987년 3월 <한라산>을 발표했던 시인 이산하. 제주 4·3 항쟁은 <한라산>을 통해 비로소 역사가 됐다. 오랜 절필 후 이산하는 지난해 새 시집 <악의 평범성>을 출간했다. 나치 전범 아이히만에 대한 심경을 밝힌 한나 아렌트처럼 “이 시집엔 희망이라는 단어가 하나도 없다”고 고백했다. 그는 지금 몸까지 아프다. 많은 지인들은 그가 버텨서 견뎌냈던 그 시절의 빚을 ‘선불 조의금’으로 갚고 있다. 나는 이번 대선을 ‘선불 조의금’으로 건네고 싶었다. 뻔하지 않은 내일을 안기고 싶었다. 낡은 정치와 또 다른 이산하인, 나의 대결. 20대 대선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러나 비호감 대선의 바닥은 생각보다 깊었다. ‘누가 잡아도 나라 안 망한다’는 말이 16년 만에 배회한다. ‘이(저)쪽이 되면 다 죽는다’는 공포감도 짙다. 내 후보를 지지하는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지지자들의 성숙한 지지는 대선 후보가 시대정신을 읽게 하는 힘이다. 노혜경 전 노사모 대표는 “낡은 정치를 청산하자는 노무현 후보의 대선 구호가 먹힐 수 있었던 건 노사모가 낙선운동이 아니라 당선운동을 전개했고, 정치를 움직여온 기존 방식(돈, 조직)을 바꿨고, 이해관계가 아닌 신뢰와 존중을 정치적 언어로 가져왔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지지자의 자리를 생각한다. 사랑하는 일이다. 특히 대선 후보급 정치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가 만들고 싶은 세상에 내가 들어가는 일이자, 그 세상을 만들기 위한 의지와 능력을 그에게 요구하는 일이다. 지지자인 나도 의무와 책임이 필요하다. 인간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는 것, 그렇지만 내가 물러설 수 없는 가치를 배반하지 않고 그가 시대를 진보시키는 방향으로 간다면 손 놓지 않는 것. 성숙한 지지란 이런 태도일 테다. 노사모는 2002년 대선에서 그를 제대로 사랑하기 위해 고민했다. 100% 좌파적 비전을 갖지 못했고, 때론 타협을 모르는 고집불통 후보였다. 일부가 아닌 일관된 정체성을 보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가 ‘언론과의 전쟁’을 주제로 한 100분 토론에 참석하기로 했다가 결정을 번복한 일이 있었다. 노사모 게시판엔 변절을 두고볼 수 없다는 성토가 쏟아졌다, 20시간 동안 치열한 논쟁이 오간 끝에 ‘대원칙은 타협할 수 없지만 작은 일엔 대범하자’는 ‘사랑하기 위한’ 기준을 마련했다. 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도 ‘노무현의 타협’으로 시끄러웠던 사건이었다. 그는 현실성 없는 대안보다 분배 정의 차원에서 해결하겠다고 했다. 노사모는 약자를 배려하는 대원칙을 확인하고 그의 입장을 인정했다. 노 전 대표는 이 관계를 “노 전 대통령은 ‘노사모이즘’, 노사모는 ‘노무현이즘’이라 명명했다”고 소개했다.

순정한 지지도 있다. 그러나 추종과 다름없다. 여기엔 상대 후보만 아니면 된다는 심리가 똬리를 틀고 있다. 이번 대선만 해도 한 신학자가 ‘000 안 찍는 사람은 악마’라고 했고, 민주화를 노래했던 가수는 마이클 잭슨까지 소환해 여성 혐오를 부추겼다. 저마다의 불안감을 불러내 갈라치기 이데올로기를 동원하는 ‘이데올로기 불러내기’(알튀세르 정의)다. 이는 최종 선택도 받지 않은 야당 후보가 검찰 공화국을 선포하는 지경까지 끌고 갔다. SNS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논쟁 대신 비아냥, (자기 의견 없는) 퍼나르기로 진영 정치는 더 강고해졌다. 이런 풍토에선 내가 좋은 후보가 아니라 상대가 싫어하는 후보를 출전시키는 추세로 간다. 싫은데 순도 높은 지지가 될까. 여야가 이재명·윤석열 후보를 선출한 것, 제3후보 안철수가 이번 대선에서 유독 막강한 이유는 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

대선은 꿈꿔온 세계에 한발 더 가까워지는 때다. 여야도 낡은 정치 청산으로 화답했다. 하지만 남루한 대선이다. 87체제는 ‘군부독재만 아니면’ 용인했다. 그동안 검찰·관료 등은 힘을 키웠고 이번 대선에서 무한 권력을 행사했다. 기획재정부 장관이 선출권력에 반기를 들고, 검찰총장과 감사원장 출신이 야당 대선 후보로 출마했다.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 무기를 들었다.” 사파티스타 부사령관 마르코스의 간절함을 빌려서라도 나는 낡은 정치와의 대결에서 꼭 이기고 싶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천둥 같은 그리움만은 잃지 않겠다’고 한 시인 이산하에게 조금이라도 빚을 갚고 싶다.

남은 20여일, 우리가 반란을 일으키자. 성숙한 지지를 보여주자. 그리고 “당신은 왜 대통령이 되고 싶은가”라고 집요하게 묻자. 끝내 사랑할 명분을 주지 않으면 그때 포기해도 늦지 않다.

구혜영 정치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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