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자의 자리를 생각한다. 사랑하는 일이다. 특히 대선 후보급 정치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가 만들고 싶은 세상에 내가 들어가는 일이자, 그 세상을 만들기 위한 의지와 능력을 그에게 요구하는 일이다. 지지자인 나도 의무와 책임이 필요하다. 인간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는 것, 그렇지만 내가 물러설 수 없는 가치를 배반하지 않고 그가 시대를 진보시키는 방향으로 간다면 손 놓지 않는 것. 성숙한 지지란 이런 태도일 테다. 노사모는 2002년 대선에서 그를 제대로 사랑하기 위해 고민했다. 100% 좌파적 비전을 갖지 못했고, 때론 타협을 모르는 고집불통 후보였다. 일부가 아닌 일관된 정체성을 보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가 ‘언론과의 전쟁’을 주제로 한 100분 토론에 참석하기로 했다가 결정을 번복한 일이 있었다. 노사모 게시판엔 변절을 두고볼 수 없다는 성토가 쏟아졌다, 20시간 동안 치열한 논쟁이 오간 끝에 ‘대원칙은 타협할 수 없지만 작은 일엔 대범하자’는 ‘사랑하기 위한’ 기준을 마련했다. 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도 ‘노무현의 타협’으로 시끄러웠던 사건이었다. 그는 현실성 없는 대안보다 분배 정의 차원에서 해결하겠다고 했다. 노사모는 약자를 배려하는 대원칙을 확인하고 그의 입장을 인정했다. 노 전 대표는 이 관계를 “노 전 대통령은 ‘노사모이즘’, 노사모는 ‘노무현이즘’이라 명명했다”고 소개했다.
순정한 지지도 있다. 그러나 추종과 다름없다. 여기엔 상대 후보만 아니면 된다는 심리가 똬리를 틀고 있다. 이번 대선만 해도 한 신학자가 ‘000 안 찍는 사람은 악마’라고 했고, 민주화를 노래했던 가수는 마이클 잭슨까지 소환해 여성 혐오를 부추겼다. 저마다의 불안감을 불러내 갈라치기 이데올로기를 동원하는 ‘이데올로기 불러내기’(알튀세르 정의)다. 이는 최종 선택도 받지 않은 야당 후보가 검찰 공화국을 선포하는 지경까지 끌고 갔다. SNS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논쟁 대신 비아냥, (자기 의견 없는) 퍼나르기로 진영 정치는 더 강고해졌다. 이런 풍토에선 내가 좋은 후보가 아니라 상대가 싫어하는 후보를 출전시키는 추세로 간다. 싫은데 순도 높은 지지가 될까. 여야가 이재명·윤석열 후보를 선출한 것, 제3후보 안철수가 이번 대선에서 유독 막강한 이유는 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
대선은 꿈꿔온 세계에 한발 더 가까워지는 때다. 여야도 낡은 정치 청산으로 화답했다. 하지만 남루한 대선이다. 87체제는 ‘군부독재만 아니면’ 용인했다. 그동안 검찰·관료 등은 힘을 키웠고 이번 대선에서 무한 권력을 행사했다. 기획재정부 장관이 선출권력에 반기를 들고, 검찰총장과 감사원장 출신이 야당 대선 후보로 출마했다.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 무기를 들었다.” 사파티스타 부사령관 마르코스의 간절함을 빌려서라도 나는 낡은 정치와의 대결에서 꼭 이기고 싶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천둥 같은 그리움만은 잃지 않겠다’고 한 시인 이산하에게 조금이라도 빚을 갚고 싶다.
남은 20여일, 우리가 반란을 일으키자. 성숙한 지지를 보여주자. 그리고 “당신은 왜 대통령이 되고 싶은가”라고 집요하게 묻자. 끝내 사랑할 명분을 주지 않으면 그때 포기해도 늦지 않다.
구혜영 정치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