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스크바강을 따라 고리키 공원으로 내려갔지요. 변화의 바람에 귀를 기울이면서.” 독일 록 그룹 스콜피온스의 노래 ‘변화의 바람(Wind of Change)’은 이렇게 시작한다. 스콜피온스는 1988년 첫 소련 공연 때 이 노래를 착안했다. 1992년 스콜피온스가 미하일 고르바초프 앞에서 부른 뒤 이 노래는 지난 30일 작고한 그에게 바치는 헌사로도 간주돼왔다.
사실 소련의 해체는 고르바초프가 원하거나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1985년 소련 최고권력자가 된 그는 부패하고 비효율적인 국가자본주의 체제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봤다. 변화를 거부하는 KGB, 군부 등 강경 보수파와 자유를 원하는 시민들 사이에 타협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 고민이었다. 1987년 2월 그는 “문제는 민주주의냐 아니면 사회적 타성과 보수주의냐다. 그 중간은 없다”고 실토했다. 그의 선택은 곧 정치·경제 시스템의 구조조정(페레스트로이카)과 토론과 논쟁을 허용하는 정치적 개방(글라스노스트)이었다. 스탈린의 폭정을 비판하고 체르노빌 원전 사고에 대한 문제제기를 허용했으며 다당제 투표를 실시했다. 미국과 중거리핵무기 폐기 협정을 맺었고, 동유럽 국가에 대한 군사개입 정책인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기했다. 동·서독의 통일 과정을 묵인한 것은 그 연장이었다.
하지만 억눌려 있던 각계의 요구는 무섭게 분출했다. 중앙권력은 순식간에 통제력을 상실했다. 변해야 한다는 절박함과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변화의 바람에 올라탔지만, 결과적으로 체제 붕괴를 촉진한 셈이 됐다. 1991년 12월 소련 해체 후 그는 서방에서 영웅으로 추앙받았지만, 자국에서는 배신자로 매도당했다. 그를 쫓아낸 보리스 옐친이 높은 강도로 민영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경제사정은 악화됐고 빈부 격차도 심화됐다. 여기에 핵군축 당시 국방비를 복지와 경제에 쏟자고 약속했던 미국이 막대한 군비지출을 정당화할 새로운 적을 찾아나서며 러시아 내 배신감이 커졌다. 그 결과 ‘힘 있는 러시아’를 기치로 내건 블라디미르 푸틴이 나타나 장기집권하고, 결국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데 이르렀다. 고르바초프 뿐 아니라 ‘변화의 바람’에 환호했던 지구촌의 어느 누구도 예상 못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