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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하이, 항저우, 진장,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을 거쳐 쓰촨성 충칭에 마지막 둥지를 틀었을 때는 중일전쟁이 한창이었다. 연합군 참전과 독자적 대일전쟁 수행을 위한 광복군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그러나 이국땅에서의 군 창설은 만만치 않았다. 중국 정부는 자국의 군사위원회가 광복군을 지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시정부는 당연히 독자적인 군 창설을 고집했다. 중국이 양보하지 않자 김구 주석은 장제스의 승인 없이 1940년 9월17일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창립대회를 거행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 당시 상황을 전했다. “나는 임시정부에서 이청천(지청천)을 광복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하와이 동포들로부터 원조받은 3만~4만원 등 가진 역량을 다하여 중국과 서양 인사를 초청하고 우리 한인을 총동원하여 충칭 가릉빈관에서 광복군 창립식을 거행했다.”
몸통(사병) 없이 머리(총사령부)부터 시작한 광복군의 과제는 병력 확충이었다. 중국 내 독립군, 일제에 강제징집된 한인 청년이 초모 대상이었다. 장준하·김준엽 등이 일본군을 탈출해 광복군에 들어왔고,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소속 100여명도 합류했다. 30명으로 출범한 광복군은 5년이 지나자 병력 1000명에 가까운 정규군으로 성장했다. 용기백배한 임시정부는 일제의 하와이 진주만 공습에 맞서 대일전쟁을 선포했다. 중일전쟁의 격전지인 인도·버마 전선에는 병력을 파병했다. 1945년 8월에는 미국 정보기관 OSS를 도와 국내 진공작전을 세웠으나 일본 항복으로 무위로 끝났다.
해방 후 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인 자격으로 귀국하길 원했다. 그러나 미 군정은 ‘사설 군사단체 해산령’으로 저지했다. 급기야 지청천 총사령관은 광복군 요원들의 귀국이 마무리되자 1946년 5월16일 중국 땅에서 쓸쓸히 군대 해체를 선언했다. 광복군은 임시정부의 명실상부한 군대였다. 현대식 군편제를 갖추고 전투경험도 쌓았다. 그러나 정작 광복이 됐을 때 광복군은 조국땅을 밟지 못했다. 전통이 대한민국 군대로 제대로 이어지지도 못했다. 국군의날을 휴전선 돌파일(10월1일)이 아닌 광복군 창립일(9월17일)로 해야 한다는 요구도 묵살됐다. 허허로운 광복군 80주년이다.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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