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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R 기계를 활용한
인지적 공감의 확장은
타인의 복지를 위한
행동 변화를 만드는
여러 수단을 동원해야 할
중층적인 문제다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초속 5m 속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석탄 컨베이어 벨트를 체크하기 위해 석탄 가루가 날리는 기계실에 들어간 스물네 살 김용균씨는 끝내 퇴근하지 못했다. 용균씨처럼 산업 재해로 떨어지고 끼고 잘려서 사망하는 국내 노동자는 하루 평균 2명에 달한다고 한다. 고통을 겪는 유족들과 관련 산업 종사자들의 요구로 법 개정도 일어나지만, 언론에 단신으로 등장하는 그때뿐, 관련자가 아닌 사람들은 이런 끔찍한 지옥의 반복을 금세 잊는다.
MBC는 이런 처참한 상황을 모두의 문제로 만들어보고자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활용해보기로 했다. 이른바 ‘가상현실(virtual reality, VR) 저널리즘’의 시도로서 가상현실 기술을 적용해 용균씨가 근무했던 열악하고 위험한 발전소 환경을 컴퓨터로 구현한 것이다. 핵심 아이디어는 이렇다. 태안 화력발전소의 근무 환경이 얼마나 위험 천만했었는지를 이야기한들, 아직도 우리 청년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목숨을 걸고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는 끔찍한 현실을 이야기한들, 잠깐 분노하고 슬퍼할 뿐 더 깊은 공감을 이끌어낼 수가 없으니 VR 기계를 머리에 쓰고 현실을 재현한 가상현실에서 직접 김용균을 만나는 체험을 해보자는 것이다. 이를 경험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이 상황에 대해 훨씬 더 깊이 공감할 것이라는 예상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MBC VR 휴먼 다큐멘터리 <용균이를 만났다>는 김용균씨의 휴대 전화에서 복원한 900여장의 발전소 사진과 몇몇 영상을 토대로 석탄 가루가 어지러이 휘날리고 컨베이어 벨트가 무섭게 돌아가는 발전소 내부를 실감 나게 모사했다. 또 용균씨의 사진과 음성을 토대로 그때 그의 모습을 최대한 실제와 비슷하게 만들었다. 제작진은 교수, 주부, 취업준비생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시민 12명을 스튜디오에 초대했고, 그들은 헤드마운트디스플레이(HMD)를 쓰고 말 그대로 타인의 삶을 체험했다. 체험 전 인터뷰에서 시민들은 용균씨의 사고에 대해 모르거나 알더라도 정확히 어떤 사고였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대부분의 체험자는 용균씨가 처한 열악한 근무 환경에 큰 충격을 받았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니었다. 용균씨의 관점에 서봄으로써 내 일이 아니라고 여겼던 사건이 내 일처럼 생각됐다고 한다. 한 체험자는 용균씨가 그저 자신이랑 똑같은 청년임을 알았고, 그래서 “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하고 싶었던 게 많았을까? 하는 생각이 더 많이 든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다른 체험자는 참사에 무관심했던 자신을 반성하기도 했다. 어쩌면 비극이 계속되는 원인도 기성세대의 무감각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고백한 것이다.
물론 이 다큐멘터리는 통제된 실험을 수행한 과학 연구는 아니다. 체험 전과 후에 체험자의 공감 수준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측정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가상현실에서 타인의 삶을 경험하고 타인의 관점에 서보는 것은 공감력을 확대하는 데 어느 정도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 같다. 전통적인 언론 매체인 신문에서도 사건에 따라 VR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2015년 뉴욕타임스는 어안 렌즈식 카메라를 활용해 360도 전 방향을 볼 수 있게 만들어 아프리카와 중동의 아동 난민의 삶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게 한 다큐멘터리 <난민>에서 VR 저널리즘을 선보였다. 딱딱한 판지로 된 카드보드에 스마트폰을 끼워 가상현실을 느끼게 하는 저렴한 초보적 장치였는데도 내전 지역 난민 어린이들의 절규를 생생하게 다뤄 난민 문제 해결이 시급함을 절감하게 해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감정 전염을 이끌어내는
콘텐츠뿐만 아니라
역지사지 능력을
확장해주는 쪽으로
발전시킨다면
VR은 최고의 공감 기계로
진화할 수 있지 않을까
VR, 공감력 확산에 큰 장점
현재 VR 기술의 발전 방향은 자신의 신체를 디지털 아바타에 이식한 채 ‘메타버스(metaverse)’라는 가상의 실감 세계에 들어가 다른 사람과 상호작용하게 만드는 것이다. VR 기술이 불러올 미래에 주목한 페이스북은 아예 대표적인 VR 개발사인 오큘러스를 인수하고 사명을 ‘메타(Meta)’로 변경하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VR과 메타버스는 인간의 마음과 행동을 정말로 변화시킬까? 우리는 VR 같은 실감형 장치들을 사용함으로써 공감의 반경을 넓힐 수 있을까? 실제로 VR은 ‘궁극의 공감 기계’라고 불리기도 한다. VR 기계는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에 있는 타자들의 느낌과 생각을 더 잘 이해하게끔 돕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메타는 VR이 이용자들의 공감력 향상에 도움을 준다는 논리를 내세워 VR의 공공성을 주장한다.
이미 많은 과학자가 VR과 공감, 친사회적 동기의 관계를 연구하며 VR로 세상을 더 낫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왔다. 이것은 이른바 ‘가상현실을 활용한 체화된 공감’(이하 ‘체화공감’)에 관한 연구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연구자들은 VR 활용이 단지 타자의 상황에 연민을 느끼는 정서적 공감을 넘어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인지적 공감까지 높일 수 있는지를 질문한다. 편견과 혐오를 줄이기 위해서는 단지 감정만이 아니라 생각을 바꾸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VR은 그런 면에서 큰 장점이 있다. 자신의 신체를 디지털 아바타에 전송함으로써 말 그대로 다른 사람이 되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대개 우리는 타자와 신체적 정체성이 유사할 때 더 쉽게 공감한다. VR은 자신과 사회적·신체적 정체성이 다른 외집단 아바타를 정밀하게 구현해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구성할 수 있다. 가령 연구자들은 VR 기술을 활용하여 흑인, 여성, 노인, 난민, 자폐인, 조현병 환자 심지어는 다른 종을 경험했을 때 공감력이 확장되는지 실험해왔다.
한 연구에서는 실험 참여자를 두 집단으로 나누어 한쪽에서는 VR로 적록 색맹 아바타를 통해 색맹이 되어보게 했고, 다른 집단에는 그저 적록 색맹이라면 어떨 것 같은지를 상상만 하게 했다. 그러고는 실험이 끝난 뒤 색맹을 위한 웹사이트를 개선하는 과제를 주었다. 과제 수행 여부는 본인이 알아서 하도록 했다. 그 결과 색맹 아바타를 경험한 집단이 상상만 하게 한 집단에 비해 그 과제에 할애하는 시간이 두 배나 많았다. 또 다른 연구에서는 가상현실에서 4세 아이를 키우는 엄마 아바타와 상호작용한 진짜 엄마의 경우 자신의 양육 방식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고 말했으며 자녀에 대한 공감 수준도 증가했다.
편견과 차별을 없애는 데 유용
이런 연구를 보면 타인의 관점을 수용하는 것, 즉 역지사지는 상상으로도 가능하지만 VR 기계를 이용하면 더욱 효과적이다. 또한 관점 수용으로 일어나는 행동 변화는 개입 수준에 따라 장기적일 수 있으며, 공감의 대상도 우리가 전혀 생각해본 적 없는 낯선 집단으로 확장될 수 있다. 따라서 VR은 근육을 키우듯이 공감을 단련하는 공감 교육의 장치로 활용 가능하며 성차별주의, 인종차별주의, 연령차별주의, 능력주의, 종차별주의 등 세상에 존재하는 여러 형태의 차별을 줄이는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VR과 같은 첨단기술을 활용해 문명의 위기를 초래하는 편견과 차별을 없앨 수 있을까?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모든 과학 연구가 그렇듯이 부정적인 사례들도 있다. VR이 정말로 사용자의 공감력, 다시 말해 공감의 정서적 측면과 인지적 측면을 다 높여주는지, 아니면 이들 중 하나만 높여주는지에 대해 지난 5년 동안 5644명을 상대로 한 모든 연구를 메타분석한 연구가 있다. 이 연구를 요약하면 이렇다. 어떤 형태의 VR이라도 사용자의 공감력을 향상케 하지만 인지적 공감보다는 감정적 공감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VR은 공감력 향상 면에서 독서보다 효과가 더 크지 않았고 얼마나 실감나는 VR인지는 공감력 향상에 별 영향을 주지 않았다. 자칫 VR의 실감 상황에만 압도된다면 드라마를 보고 주인공의 불쌍한 처지에 눈물을 펑펑 쏟아내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개그 프로그램을 보고 깔깔 웃듯 타인의 비극을 스펙터클로만 소비할 우려가 있다는 이야기다. 진정으로 타인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내가 그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있다. VR을 통한 정서적 공감만으로는 그저 분노했음에 만족할 뿐 어떤 변화를 이끌어내는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
그렇기에 VR 기계를 활용한 인지적 공감으로의 확장은 타인의 복지를 위한 행동 변화를 만드는 다양한 수단을 아울러 동원해야 하는 중층적인 문제이다. 예를 들면 VR 체험을 서사적으로 구성해 여러 쟁점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다. 태안 화력발전소 참사를 둘러싼 잘못된 관행과 무책임한 관리자의 행태를 경험하거나 관련법과 규정이 얼마나 미비한지 목격하는 것이다. 또한 VR 체험을 하고 타인에 대한 정서적 공감이 고조되어 있을 때 그의 문제가 무엇이고 개인적·사회적·제도적 해결책은 어떤 것이 있을지 함께 토론하는 프로그램을 짤 수도 있다.
타인에게로 향하는 기술은 아직 요원한가? VR의 경우에는 분명히 가능성이 있다. 감정 전염을 이끌어내는 콘텐츠 뿐만 아니라 역지사지 능력을 확장해주는 쪽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기후위기를 아무리 얘기해봐야 쉽게 다가오지 않지만 지구 기온이 1.5도 높아졌을 때의 서울과 부산 모습을 VR 콘텐츠로 제작하여 체험하고 소감을 나누고 관련 법규들을 함께 공부하고 기온 상승을 막기 위한 실천을 해보는 식이라면, VR은 최고의 공감 기계로도 진화할 수 있지 않을까?
<장대익 가천대 창업대학 석좌교수(학장)>
연재 | 장대익의 에볼루션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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